Cul-Life

추락

기시군 2025. 8. 27. 11:26

#추락 #JM쿳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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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문학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작가 쿳시가 부커상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정도의 지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장바구니에 담아놓은지 그리 오래지 않아 주문을 했고, 책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책의 수준에 꽤나 놀랐다. 

줄거리 소개에 앞서 당시 상황을 조금은 알고 있어야 한다. 90년대 후반, 인종차별의 상징이었던 남아공에서 드디어 만델라 정권이 탄생했다. 이 흑인정권은 평화를 위해, 죄를 고백하고 사죄하면 처벌을 하지 않은 ‘진실화해위원회’을 출범시키며 흑백갈등을 잠재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소설은 그즈음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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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는 피하는 줄거리 소개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책은 그럴 수가 없다. 꽤 많은 내용을 소개해야 한다. 

주인공 루리는 중년의 이혼남이자 대학교수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 20살의 ‘멜러니’에게 사랑을 느낀다. 소극적으로 거부하던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관계를 맺는다. 이 사실이 학교 내에 퍼져 그는 ‘위원회’에 소집된다. 진정한 사과를 하면 휴직으로 끝내 주겠다는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한 그는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에게는 시골에서 자기 파트너와 농장을 운영하는 딸 루시가 있다. 학교도 그만둔 참, 잠시 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레즈비언인 딸은 파트너와 헤어져 혼자, 이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위험하기도 하고 일도 돕고, 글도 쓸 생각에 한동안 딸의 농장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어느날, 3명의 낯선 흑인들이 농장을 쳐들어왔다. 폭행과 감금, 루시는 얼굴에 알콜이 뿌려지고 불을 붙여 화장실에 갇힌다. 그 사이 루시는 그 침입자들에게 집단으로 일을 당한다. 집안의 값나가는 곳은 모두 사라졌다. 그의 차도 사라졌다. 가장 마음 아픈 건 딸의 상태다. 소극적으로, 루리가 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침입자들을 이해하는 듯 행동한다. 추락 중 인 것인가. 안달이 나 그녀를 다그치지만, 딸은 루시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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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주인공 교수가 빌런인지도 모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행위가 사랑에 의한 정당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지위를 이용한 ‘요소’가 조금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사랑’ 임으로 죄의식을 가지지 못한다. 책의 끝까지도 그는 도덕적 무감각, 자기 합리화의 틀을 깨지 못한다. 이건 당시 백인으로 흑인들에게 가했던 가해자들이 정권교체 후 진심여부와는 상관없이 간단한 사과로 행위들을 합리화시킨 일의 알레고리다. 

그 대비로 작가는 딸의 ‘사건’을 구성해 넣는다. 레즈비언에게 집단강간은 얼마나 끔찍한 일일까. 하지만 그녀는 그 부분을 양해하는 자세를 취한다. 독자로 핍진성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흑인들에게 가해자였던 백인의 역사적 책임, 그 상징, 반성의 의미. 그리고 소설의 앞부분과 대비를 위한 장치로 서술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했다. 하지만 난 온당치 못하다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리얼리즘 소설의 구조를 따라가는 작품에서 왜 이 부분만 상징과 개념으로 이야기를 풀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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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책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책 읽는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작가임엔 틀림없다. 인종과 계급, 그리고 성에 관한 깊이 있는 사유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의 편린들이 화려하다. 서사를 끌고 가는 힘 역시 대단하다. 노벨문학상을 포함, 여러 상들을 수상할 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어 그들의 생각을 흔들려는 작가의 의도가 먹혀들어간 작품이다. 작가의 책을 더 찾아볼 생각이다. 뒤늦게 보석을 발견했다. 

✍ 한줄감상 : 리얼리즘 소설로 시작하지만 질문만이 가득한 책. 식민지배와 페미니즘, 화해와 용서의 범위 등에 대한 독자 자신의 대답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센 책.   

p9 “ 섹스에 관한 한, 그의 기질은 강렬하기는 하지만 결코 정열적이지는 않다. 만약 그가 상징물을 택한다면, 그것은 뱀이 될 것이다. 그는 소라야와 나누는 섹스가 뱀들의 교접과 다소 비슷하리라 상상한다. 길고 열중해 있지만, 가장 뜨거울 때조차 추상적이고 다소 메마른 섹스. “ 

p23 “ 시란 처음 읽었을 때 끌리지 않으면 안 돼. 계시의 섬광과 반응의 섬광이랄까. 번개처럼,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

p27 “ 여자의 아름다움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건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선물의 일부야. 여자는 그걸 나눌 의무가 있지. “ 

p63 “ 그는 생각한다. 밤낮으로 돌아가며 명성을 갈아대는 소문의 방앗간. 구석에서 , 전화로, 닫힌 문 뒤에서 회의를 여는 정의의 공동체. 기쁨에 들뜬 속삭임들. 샤덴프로이데. 판결부터 내리고, 재판을 한다. “ 

p72 “ 삶에는 신중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

p79 “ 좋습니다. 나는 멜러니 씨와 관계를 맺을 때 내 지위를 이용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것이었고, 나는 그걸 뉘우치고 있습니다. 당신한테는 그걸로 충분치 않습니까? “

p100 “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추해질 수 있지. “

p104 “ 그는 몸을 가꾸지 않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 

p129 “ 욕망은 다른 얘기지. 어떤 동물도 본능을 따르는 것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을 수긍하지 못할 거다. “ 

p189 “ 그녀는 고집이 셀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택한 삶에 깊이 빠져 있다. “

p219 “ 그녀는 그이 생각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 하지만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증오했을까요? 저는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 

p222 “ 증오…… 아버지, 남자들과 섹스의 문제에 관한 한, 이제 어떤 것도 저를 놀라게 하진 못해요. 어쩌면 남자들은, 여자를 증오하면 섹스가 더 자극적이 되나 봐요. “ 

p291 “ 저는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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