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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진 수어사이드

기시군 2025. 10. 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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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진수어사이드 #제프리유제니디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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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세계는 잔인하다. 자살한 딸들이 구급차로 실려 나가는 동안, 구겨진 현관 매트를 발끝으로 펴고 있는 아이들의 엄마가 존재한다. 나쁜 일이 벌어지는 쇠락해 가는 리즈번의 집을 마을 사람들은 무덤을 바라보듯 멀리한다. 지역 언론은 문제 제기의 탈을 쓴 선정적 보도에만 열을 올린다.

그나마 예뻤던 딸들에게 관심이 있던 동네 남자아이들만이 고립된 그녀들과의 접촉을 시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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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큰 의미 없는 소설이라 줄거리를 간략히 본다.

쇠락해 가는 디트로이트 근교에 리즈번 가족이 살고 있다. 동네 학교 교사이자 아내에게 꽉 잡혀 사는 소심한 아버지 리즈번, 그리고 종교적 광신의 기운이 짙은 리즈번 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다섯 딸들. 줄거리는 단순하다. 막내딸 세실리아의 자살을 시작으로,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딸이 차례로 자살한다는 이야기다.

독특한 점은 소설 속에서 리즈번 가족의 마음이나 말,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술은 철저히 ‘복수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그녀들과 또래인 남자아이들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남겨진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오는 전경, 기억, 흔적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해석하고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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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자동차 산업이 몰락해 가던 디트로이트의 암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종교적 광신이 아이들에 대한 학대로 이어지고 그것이 끔찍한 비극으로 귀결되는 이 소설은 시대에 대한 고발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저자는 나름의 ‘형식 미학’을 창조하려 했다고 본다. 형식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있다는 미학관을 지녔을 가능성이 크다. 익숙하지 않은 ‘1인칭 복수 화자’를 통한 서술이 그 증거일 것이다. 소설 어디를 찾아도 피해자인 ‘소녀들’의 깊숙한 내면이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들을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소설이란 ‘진실’에 닿을 수 없는 관찰자들의 ‘기억’을 통해 ‘재현’된 비객관적인 의견들의 모음이라는 숨은 주제가, 이 책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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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후반부에서 해설자는 이 소설의 ‘아름다움’을 언급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관찰자 시점의 거리감은 감정적 동요를 줄였고, 그녀들의 더 끔찍한 삶을 직접 마주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 결과 ‘현실’은 기묘한 방식으로 왜곡되고 대상화되었다.

끔찍하고 진저리 쳐지는 피바다 이후, 사람들은 시신을 치우고 자신들이 만든 형식극(장례식 등) 속에서 죽음을 애도하며, 레퀴엠을 들으며 대외적인 ‘자위’ 의식을 치른다. 작가 역시 ‘형식 실험’이라는 이름의 작곡 실력을 발휘해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레퀴엠을 작곡했다고 나는 본다. 문학적 가치나 시도 자체, 혹은 독자들의 호응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없다. 다만 한 명의 독자로서, 내게 이 소설은 ‘좋은 소설’은 아니었다.

✍ 한줄 감상
다섯 자매의 자살 이야기. 그녀들의 ‘왜’가 궁금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결국엔 작가의 ‘왜’가 더 궁금해졌다.

덧.
남는 생각. 소년들(성인이 된 그들)은 정말로 소녀들을 이해하고 싶었던 걸까? 그들의 후일담에 남은 ‘죽음까지도 이해한다’는 말 속에는, 그녀들을 ‘소녀의 탈을 쓴 여인들’로 욕망한 흔적이 배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p16 “ 리즈번 자매들은 열세 살(서실리아), 열네 살(럭스), 열다섯 살(보니), 열여섯 살(메리) 그리고 열일곱 살(터리즈)이었다. “

p103 “ 트립과 럭스가 어떻게 처음 만났고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둘 다 서로를 좋아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트립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긴 전성기 동안 사랑을 나눈 418명의 소녀와 여인들에게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말을 아꼈다. “

p153 “ 리즈번 부인은 데이트 중에 생겨날 수 있는 불건전한 욕구가 야외에서의 건전한 웃고 떠들기로 상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p181 “ (트립) 이상도 하지. 내 말은, 난 그 애(럭스)를 좋아했어. 정말로 좋아했다고. 그런데 한 순간 갑자기 질려 버린 거야. “

p185 “ 리즈번 부인이 집을 철통같이 굳게 닫아걸고 몇 주가 지나자 지붕 위에서 정사를 벌이는 럭스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

p250 “ (소녀들이 편지) 가장 긴 것의 내용은 이랬다. ‘ 이 어둠 속에도 빛이 있을 거야. 우리를 도와주겠니? ‘ “

p289 “ 리즈번 자매들이 자살한 날은 서실리아가 손목을 그은 날로부터 정확히 일 년째 되는 6월 16일이었던 것이다. “

p320 “ 대다수 사람들에게 자살은 러시안룰렛과도 같다. 총알은 오직 한 개의 약실에만 들ㄹ어 있다. 리즈번 자매들의 경우에는 모든 약실에 총알이 들어 있었다. 부모의 학대라는 총알. 유전적 성향이라는 총알. 시대적 병리라는 총알. 피할 수 없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총알. 나머지 두 개의 총알에는 딱히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약실이 비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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