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하는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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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본주의’ 자체를 깊이 고민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한 세기 남짓 실험된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는 유일한 대안으로 남았다. 하지만 유일하다는 이유만으로 착취와 억압,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 다음이 궁금했다. 그 사이 진보적 철학자들은 자본주의를 어떻게 연구해왔을까? 어렵겠다는 각오로 이 책을 읽었고, 실제로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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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의 진보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와 독일의 젊은 철학자 라엘 예기가 2018년 현존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을 논의한 대담 기록이다.
먼저 정통 좌파들이 정의한 자본주의의 특성을 정리해보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임노동을 통한 잉여가치 창출, 필요 충족이 아닌 이윤 추구, 그리고 경제 구조가 이념을 결정하는 토대-상부구조의 관계로 요약된다.
이 철학자들은 지금의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그 변화의 역사와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자본주의는 중상주의에서 상업·산업 자본주의, 국가관리(사회민주적) 자본주의, 그리고 현재의 금융자본주의로 발전해왔다. 그 과정에서 가사노동·돌봄, 가족관계, 자연환경, 국가와 제도까지 자본주의 질서에 포섭되었다.
프레이저 교수는 이런 질서가 생산 영역이 돌봄을 외면하고,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며, 시장 논리가 모든 관계를 잠식하는 방식으로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반면 예기 교수는 거대한 ‘반(反)자본주의 혁명’보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새롭게 구성하자는 입장이다. 즉, 일과 돌봄, 공동체의 영역에서 ‘효율’보다 ‘의미’를, ‘경쟁’보다 ‘상호인정’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자본주의를 완전히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식하는 구조’로 변한 자본주의를 내부에서 비판하고 수정하자는 입장에 가깝다.
책 후반부에서 프레이저는 미국 민주당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계급을 소외시키며 트럼프의 극우 포퓰리즘을 부추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인권과 다양성을 내세운 진보가 왜 실패했는지 짚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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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재생산 비용보다 낮은 급여를 받는 비정규직과 플랫폼 노동자의 현실을 보고 있다. 투자자는 이들을 수탈하는 대출상품으로 자본을 축적하지만, 시민·노동자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한다. 인구, 교육, 주택 문제 모두 자본의 집중과 소수 계급의 부의 독점에서 비롯된다.
이 책이 자본주의 개선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이어진 사유의 흔적을 통해 문제의식을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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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은 있다. ‘이윤율 저하’를 타지역·타인종의 수탈로 메꿨다는 기존 이론 외에도 기술 발전의 영향, 특히 2025년 현재 AI가 자본주의에 미치는 변화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책의 집필시기 때문일 것이다. 추가로 찾아봐야할 주제라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죽은 뒤에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 형태는 달라질 것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제대로된 민주주의’다. 자본의 독점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말자. 제발.
✍ 한줄감상 : 자본주의를 ‘건드릴 수 없는 경제적 자연법칙’으로 여기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 비판의 시작이다.
p23 “ 자본주의는 자연을 에너지와 원료를 뽑아낼 ‘수도꼭지’로 보면서 동시에 쓰레기를 처리해 줄 ‘하수구’로도 여기거든요. “
p27 “ 자본주의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냥 멈춰버렸어요. “
p49 “ 베버의 경우는 자본주의적 ‘부의 추구’가 행복은 물론이거니와 필요나 소망의 충족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됐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
p53 “ 독일에서는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영어권보다 더 경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시장사회’라는 완곡한 표현을 써요. “
p75 “ 역사에서 ‘생산적’ 임금노동과 ‘비생산적’ 비임금노동의 분할은 여성 종속의 현대 자본주의적 형태의 토대가 되죠. “
p107 “ 자본주의를 인식하는 최선의 방식은, 경제적 시스템도 아니고, 윤리적 삶의 사물화 된 형태도 아니며, 오히려 제도화된 사회질서로 바라보는 것이라고요. “
p187 “ 석유를 연로로 삼은 국내 사회민주주의가 해외의 군부 과두제 우두머리들에게 의존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죠… 북반구의 ‘탈물질주의’는 남반구의 물질주의(채굴, 농경, 제조업)에 의존해요. “
p231 “ ‘고타강령비판’에서는, 자신(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노동자의 노동에서 잉여를 훔친다는 이야기가 아님을 아주 분명히 밝혔어요. “
p280 “ 제 생각(프레이저)에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 경향은 표증이 아니라 심층에 내장돼 있죠. “
p305 “ 확장된 계급투쟁에는 사회적 재생산 등의 비임금/피수탈 노동을 둘러싼 투쟁과, 이를 뒷받침하는 자연적/정치적 조건을 둘러싼 투쟁 또한 포함돼요. “
p352 “ (그람시) 낡은 것은 사라지지만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궐위기에 는 다양한 변적 징후가 나타난다. “
p357 “ (진보적 신자유주의) 환경보호는 탄소 거래를 뜻했어요…. 자가보유는… 서브프라임 대출… 평등은 능력주의를 뜻했죠. “
p399 “ 가장 우선적인 필수 과제는 정치를 경제에, 재생산을 생산에, 비인간 자연을 ‘인간 사회’에 복종시키는 금융화된 자본주의를 극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해방과 사회 보호, 둘 중 어느 하나도 희생시켜선 안 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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