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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자서전 #앤카슨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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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쓴 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왔지만, 내게 시로 쓴 소설이라 느껴진 책은 아직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하나뿐이다. 이 책은 행을 시처럼 끊었지만 내겐 시의 옷을 입은 산문으로 읽혔다. 한강의 문장은 줄을 바꾸지 않아도 시였다.
평생 그리스 고전을 공부한 캐나다 시인이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대표작이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삼은 건 당연해 보인다. 카슨의 책은 올봄 '에로스, 달콤씁쓸한'으로 처음 만났다. 올해는 읽을 책이 밀려 노벨상 수상작은 건너뛸까 했는데,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지나가랴. 몇 권을 구했고 이 책부터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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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는 평이 파다해 조금 긴장했지만, 박사논문을 풀어 쓴 '에로스, 달콤씁쓸한'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읽혔다. 시의 생략과 변주, 파격적인 비유에도 금세 익숙해졌다.
알려진 대로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 빨간 날개를 단 괴물 게리온을 처치하고 그의 소 떼를 빼앗는 이야기를 가져왔다. 무대를 현대로 옮기면서 게리온은 빨간 날개가 달린 평범한(?) 남자아이가 되고, 헤라클레스는 그 아이와 가볍게 즐기는 잘생긴 탕아쯤으로 바뀐다. 카슨은 이 이야기에 '로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중세 기사 영웅담을 부르던 그 로맨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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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당연히 피해자인 게리온의 눈으로 펼쳐지고, 제목대로 '자서전'으로 완성된다.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소설은 이유 없이 헤라클레스의 화살에 쓰러지는 괴물보다, 죽음처럼 덮쳤다가 지나가 버리는 사랑(그것도 퀴어)의 흔적을 더듬는 소년에 집중한다.
책 앞부분부터 왜 빨강일까 생각하며 읽었다. 몰던 소 떼부터 빨강이던 빨간 괴물. 카슨은 서문에서 호메로스의 형용사를 두고 '형용사는 존재의 걸쇠다'라고 쓰고, 스테시코로스가 그 걸쇠를 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빨강은 게리온을 존재에 걸어 두는 걸쇠, 남이 달아 준 이름표다. 욕망의 징표이고, 게리온은 그 이름표에서 쉽게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그런데 이름표는 바깥에서 붙인다. 책 뒤쪽 문장처럼 나는 당신이 빨강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고, 당신도 내가 빨강을 어떻게 보는지 모른다. 남들이 부르는 빨강과 게리온이 안에서 겪는 빨강은 같지 않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자서전의 꼴을 빌렸다고 본다. 자서전은 남이 채운 걸쇠를 제 손으로 풀어 보는 일이다. 게리온이 사진을 찍는 사람이 되고 끝내 화산 앞에 서는 것도 그 연장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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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온이 헤라클레스에게 왜 자기를 죽였는지, 왜 자기와 잤는지 묻는다면 답은 뻔하다. '그냥, 시켜서', 아니면 '땡겨서'. 카슨은 '에로스, 달콤씁쓸한'에서 에로스는 내 안에서 생기지 않고 바깥에서 쳐들어온다고 했다. 쳐들어온 쪽은 이유를 대지 않고, 이유를 묻는 일은 당한 쪽 몫으로 남는다. 이 욕망의 자서전은 이유 없이 닥친 일을, 당한 쪽이 제 말로 다시 쓰는 이야기다.
서사를 즐기는 독자에겐 환영받지 못할 책이다. 시적 긴장과 해석의 수고를 즐기는 사람에겐 그 수고를 넉넉히 돌려준다.
✍ 한줄감상 : 출판사 홍보 문구를 인용한다. ‘잘 이해되지 않은 문장은 그냥 게리온과 함께 느끼며(?) 읽어도 좋습니다. ‘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빨강이 직접 화자로 나서는 장에서, 빨강을 본 적 없는 이에게 빨강을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물음이 나온다. 카슨의 p172 문장과 나란히 놓고 읽어 볼 만하다.
p8 “ 형용사는 존재의 걸쇠다. “
p10 “ 이 서정시는 에리테이아라 불리는 섬에서 마법의 빨강 소떼를 돌보며 조용히 살았던 이상한 날개가 달린 빨강 괴물에 대한 이야기다. “.
p62 “ 다른 인간과 대립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들이 명확해진다. “.
p78 “ 날개들은 그의 어깨에서 아주 생각 없는 작고 빨간 동물들처럼 서로 상처를 주었다. “
p95 “ 게리온의 심장과 폐는 시커멓게 탄 껍질이었다. “
p113 “ 게리온의 삶은 혀와 맛 사이에 갇힌 무감각의 시간으로 들어섰다. “.
p134 “ 색깔이 내는 소음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기 시작한 해였다. 장미들이 정원에서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
p172 “….. 나는 당신이 빨강을 어떻게 보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고 당신도 내가 빨강을 어떻게 보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빨강의자서전_기시리뷰 #Autobiography_of_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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