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쁨에도슬픔에도아랑곳없이 #박준 #난다
함께 쓴 글 - https://brunch.co.kr/@cylee89/24
🪟
시를 허세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맞다. 다만 그 허세에는 멋과 감동이 있다는 점에서 세속의 허세와 다르다.
시도 쓰며, 남의 시집을 만드는 일을 하는 시인 박준이 시인 67명의 시 68편에 산문을 한 편씩 짝지었다. 시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다. 시상에서 이어지는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뿐이다. 시가 멀게 느껴졌던 독자에게 좋은 레퍼런스 북이다.
🪟
박시인은 ‘사랑에게 존대할 생각’이라 쓰지만, 난 존대할 생각은 없다.
내가 생각하는 시인은 두 갈래다. 일상의 감각을 조탁해 감동을 끌어내는 장인 계열, 그리고 마음 깊이 가라앉은 무언가를 게워 내는 시인들. 박준, 오은이 앞쪽이라면 최승자는 뒤쪽이다. 기형도, 심보선, 이장욱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자기 세계를 지었다.
출발점은 같다. 박준도 '시상은 떠오르는 게 아니라 한없이 가라앉는 성질'이라 쓴다. 가라앉은 것을 건져 다듬으면 장인의 시가 되고, 토해 내면 다른 시가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후자가 좋았다. 잘 다듬어진 시보다 뱃속에서 아프게 튀어나온 날것의 시. 사랑처럼 나도 모르게 게워지는 것들에 '존대'할 생각은 없다.
박준시인은 감각의 '잉여'와 '결핍' 사이 '균열'을 찾아 시를 완성한다. 그 결과물에 감탄한다.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밀고 나온 시 앞에서는 지고 만다. 감탄하다 끝내 지고 마는 것, 나는 이걸 '시를 읽는다'고 말한다.
🪟
황지우 시인의 시를 오랜만에 만났다. 문득 그의 시한편을 공유하고 싶어졌다. 이 책에 실린 시는 아니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을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시를 읽는 다는 것은 이렇게 내 안에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꺼내와 이렇게 글로 만나는 일이다.
🪟
시는 실용적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 당연한 순서에 절여진 문장은 습관의 길을 따라간다. 시는 그 길을 틀어 버린다. 매일 하는 목욕처럼 내 언어에 낀 때를 벗겨 낸다.
시를 꾸준히 읽어 오신 분들은 계속 즐거운 시 읽기를. 아직 시가 편하지 않은 분들께는 조용히 이 책부터 권해 본다.
✍ 한줄감상 : 이 시대 시인들의 대표 시에 시인의 산문까지. 일타쌍피. 😉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시를 어루만지다'(김사인)가 떠오른다. 시인이 고른 시와 그 시에 대한 시인의 글로 이 책의 형식에 가깝다. 다만 김사인의 이 책은 시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된다.
p22 “ 떠오르는 숱한 말들 가운데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을 뿐, 어쩌면 그때부터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삼킨 말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p33 “ 수없이 많은 나의 시간이 별수 없이 간다. 적어도 나만큼은 이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나를 미워해서도 안 된다. “
p39 “ 언어는 시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어가 시나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시간이다. “
p89 “ 네가 기뻐할 때마다 나는 마냥 기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네가 슬퍼할 때마다 나는 매번 슬퍼했습니다. “
p140 “ 말로는 다 표현되지 못하고 남은 나의 마음을 어떤 사람들은 노래로 부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시로 씁니다. “.
p154 “ 사실 시상은 떠오르는 게 아니라 한없이 가라앉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p195 “나의 자격을 의심하고 진심을 되묻는 일, 이것을 다른 말로 겸허라 부릅니다. “
p205 “ 관점은 대상으로 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억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로소 내가 유일해지는 순간. “
#bookstagram #기쁨에도슬픔에도아랑곳없이_기시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