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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쇳밥일기

by 기시군 2022.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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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정리를 하면서 잘 쓰지 않는 단어가 있다. '감동'이란 말. 너무 감상적이라 금새 휘발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단어 말고는 함축적으로 책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짧은 한권의 책에 30대 청년의 삶이 진한 곰탕처럼 진득한 녹진함으로 남는다.  존경하는 그 분의 긴급 추천으로 바삐 읽기 시작했고, 예상외의 흡입력으로 단번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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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3개의 부로 나눠져있다. 1부는 주인공인 저자의 어린시절과 학교생활,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한 이십대 초반을 다룬다. 2부는 쇱밥이라 표현되는 '용접'을 주요 업으로 삼기 시작한 계기부터 청년노동자로 지방 제조업체들을 거치며 느끼고 겪은 사건과 사고와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들, 3부는 저자의 삶에 좀더 깊은 성찰이 더해지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쇳물에 먹물을 더하게 되는 과정이 연대기 순으로 정리된다. 조금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도 있으나, 서사 자체가 주는 매력을 훼손할 수 있어 생략한다.

다만, 서운하니 가볍게 시작되는 작가의 어린시절 이야기만 짧게 하자.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지방으로 내려온 어린 현우는 서울말씨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부모는 이혼했고 영양실조까지 걸리며 고생하던 현우는 결국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고 친모에게도 구타와 학대에 고통 받는다. 앞부분 몇페지에 벌써 KBS의 #동행 프로그램에 나와도 너무 짠하다는 소리를 들을만큼의 고통이 담겨있다.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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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지는 말자. 이 책은 빈곤포르노그라피가 아니다. 세상과 대결하는 한 젊은 청년의 분투의 기록이자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다이나믹한 드라마의 멋진 조합이다. 단정한 문장으로 담백하게 끌어가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다. 지방, 저학력, 가난이라는 굴레 안에서 저자는 정말 열심히 노력한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피폐해질 수 밖에 없는 청춘의 시간들속에서도 그는 냉소의 함정도 힘겹게 피하고, 포기의 유혹도 물리치며 '성공'보다는 '생존'을 위한 도전을 계속한다. 책을 읽으며 그를 응원하게 되고, 이 책이 해피엔딩을 간절하게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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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독자들은 오래전 '노동소설'류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아니면 한겨레21 등에서 가끔 나오는 '노동현장르포'를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다. 다르다. 노동과 사회현실을 그려내는 것은 기본이다. 오히려 책은 30대 지방 저학력 청년 노동자의 눈을 통해, 타인의 삶 따위에 관심도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위를 둘려보게할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내 삶의 조건과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다른 틀로 바라볼 기회다. 아. 그리고 자극적인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 다이나믹한 수토리텔링의 즐거움이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에세이의 탈을 쓴 하드코어 성장소설이다. 살짝 스포를 하자면 알콩달콩한 러브스토리도 이쁘게 나온다. 😁 뻔한 표현이지만 재미와 의미를 이렇게 묵직하게 담은 책은 오랜만이다.

p100 " 내 육신의 죽음만으로 나에게 닥친 불행들까지 죽일 순 없다. 불행은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옮겨가겠 그럴바에 살아남아 불행과 싸워 이기는 게  낫지 않을까. "

p117 " 어딜 가나 얼마 안 되는 승자들이 패자가 응당 가질 몫까지 몽땅 빨아들이는 현실 만 알아갈 뿐, 스물다섯 살의 나는 일찌감치 사회에 투항했다. 승자 독식에 의문을 느끼고 저항할수록 나의 초라함만 되새길 뿐이란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

p180 " 박근혜씨는 지금쯤 자기가 앉은 좌석이 왕의 권좌가 아니며, 단지 오년짜리 계약직의 야근 의자임을 알게 되진 않았을까..."

p211 " 내가 누린 일상이란 그저 불행이 닥치지 않았기에 유지됐을 분, 나 또한 언제든 다칠수있으며, 사고로 인해 삶이 끝날 수 있단 생각이 들자 온갖 나쁜 미래상이 그려졌다. "

p246 " 우리가 공장 바닥 전전하며 보낸 이십대는 그저 통장에 찍힌 얄팍한 숫자 따위가 대표할 수 없다. 사회에서 ‘못 배운 놈년들’로 통칭당하며 냉소와 조소의 대상이 되었던 우리는, 자존감을 찌그러뜨리려는 온갖 압력에 저항한 결과, 삶의 형태에 고하 따윈 없다는 소중한 지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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