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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백지 앞에서

by 기시군 2026.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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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앞에서 #최은영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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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기장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내 길티플레저는 다른 방향 쪽이다. 그런데 최은영 작가의 첫 에세이 ‘백지 앞에서’는 내 기준을 조금은 흔들었다. 소설에서 그녀는 인물 뒤에 숨었다. 에세이에서 그녀는 앞으로 나온다. 백지 앞에서 써내려 간 내밀한 일기 같은 독백이,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더 깊이 내 마음을 조여왔다.

그녀와 이야기 나누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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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녀처럼 '옳음에 사로잡혀서 나와 타인을 존중하는 일의 중요성을 놓쳤던 적'이 있었다. 비슷하게 나이 들어가며 '자기 인식'의 변화를 겪었고, '무난해 보이기 위해 나를 속'이는 일들을 이어왔다.

작가인 그녀는 작가의 세계안에 굳어있는 관념, 좋은 글, 좋은 주제, 좋은 이야기에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자기 만의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리듬’을 인정하고 주제나 의미도 의식하지 않고 말 그대로 ‘백지’ 앞에서 글을 써내려 간다고 한다. 

비작가인 난, 발표할 글을 준비하진 않는다. 그저 인생을 써내려갈 뿐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나만의 세계다. 잘 사는 것에 대해 궁금하여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 싶었다. 좋은 삶, 삶의 의미에 대한 답변이 필요했었다. 이 책은 내 삶의 정답 따위는 없다는 걸 다시 깨닫게 해준다.

스피노자는 옳음(Right)과 그름(Wrong)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좋음(Good)과 나쁨(Bad)으로 세상을 대하라 했다. 나의 백지엔 Wrong은 없다. Good만 남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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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내게 가장 선명하게 남긴 것은 '자기 연민'이라는 단어의 재발견이다.

나약한 자아도취로만 여겼던 '자기 연민'이 사실은 '자신에 대한 연민, 곧 공감'이라는 사실을 이 책 덕분에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타인에게 공감해 주면서 왜 스스로에게는 공감해주지 않으려 했던 걸까. 자기혐오에서 자기 연민으로 갈아타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

그리고, 과거나 미래 따위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유한한 찰나가 지금 내 손안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집중 p97'하려 한다는 작가의 독백에 악수를 청하고 싶어진다. 책을 통해 우리는 계속 배워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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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민감함이 책 안 가득하다. '내가 너를 알아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되는 대부분의 말은 쓰레기 맞다. 여자에게 '너는 착해 보인다'라 하는 말에는 못생김에 대한 폭력적 비유가 숨어있다. 죽은 사람 없는 계엄이었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아직 생존해 있는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가지는 트라우마를 의식하지 못한다.

사회적 폭력으로 고통은 만들어진다. 리베카 솔닛은 고통이란 우리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라 했다. 작가가 그 말을 빌려온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고. 고통은 위기를 알리는 신호이다. 개인인 나는 고통을 통해 나의 상처를 살필 수 있으며, 우리가 모인 사회 역시 개인들의 ‘고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 수 있다.

최은영 작가는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에서 자신의 글을 낭독한 적이 있다고 한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 p154', 최소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글로, 독자인 나는 일상에서, 나의 Good을 추구하며 인간의 최소한에 충실하고 싶다. 공감이 많이 가는 책을 읽었다. 다음은 소설로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

✍ 한줄감상 :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다가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좋은(Good) 작가의 정제된 한 권의 일기.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작가의 전체 작품, ‘쇼코의 미소’부터 ‘내게 무해한 사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밝은 밤’. 생각해 보니 난 작가의 전작을 다 읽었다. 😎 (잘난 척 중)

p24 “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표현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41 “ 나는 ‘밝은 밤’을 쓰면서 작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소생했다. “ 

p65 “ 당신이 나를 떠나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더라도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당신이 내게 준 마음과 우리가 나눈 시간에 대한 감사를 나는 벌지 않을 거니까. “ 

p81 “ 아픈 건 외로운 거예요. 완전히 혼자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아픈 건 자기밖에 몰라. “ 

p90 “ 경험치가 쌓이면서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기 쉽고 나약해질수록 자존심을 놓기 더 어려워지는 법이니까. “ 

p140 “ 아무리 혼자서 잘 지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타인과의 일상적인 접촉 없이 몇 달을 홀로 있으면 한계가 오기 마련이다. “ 

p148 “ 건강한 공동체는 개개인을 존중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한국의 옛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 소수자를 배제하고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기능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알 수 있는 일이다. “ 

p155 “ 외로움은 타인의 존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

p192 “ 넌 네 의견을 잘 표현하는구나,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용기가 있구나, 네 감정에 솔직해서 좋다, 같은 칭찬을 받아본 여자아이가 몇이나 될까. “ 

p219 “ 기억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자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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