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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동물입니다 무엇일까요

by 기시군 2022. 9. 13.

✔️
📕
소설가 이장욱을 좋아한다. 그의 시가 궁금했다. 약올리는 듯 한 제목에 끌렸다.

격정과 기복의 마음을 담은 시인의 시도 많다. 상대적으로 이장욱의 시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뼛속까지 차가워진 마음이 담긴다. 바지에 손을 집어넣고 약간은 느슨한 걸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자신에게 와 닿는 '그것'들을 보고 발설한다. 나즈막한 목소리의 건조한 지적질이 아프다.

아래 문장으로 이 한권의 시집을 갈음할 수 있다. " 식물성의 사유가 대체로 나와 너 사이의 거리와 경계를 무화시키고 인간의 비극과 고통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동물성의 사유는 화해와 공감을 말할 때조차 나와 너,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감을 전제한다.(p97)" 이 책은 사유의 절반, 동물성 사유의 세계를 그린다. 그의 소설 독자라면 익숙한 그의 건조한 필체로 말이다.

📗
"
당신이 나의 하루를 관람했다고 하자.
당신이 내 텅 빈 영혼을 다녀갔다고 하자.
내가 당신의 등을 더 격렬하게 바라보았다고 하자.
관람시간이 끝난 뒤에 드디어
삶이 시작된다는 것
...
당신이 나를 지나치는 일은
바로 그런 것
(p9 원숭이의 시)"

우리는 관람시간이 끝난 후 깨닫는 것이 많다. 괜히 손끝 까끌거리는 흔적들을 만지며, 그건 흔적일 뿐이잖아라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다시 시작되는 삶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어떻게든 살아내는 모습대로 걸어가면 된다. 타자와 나의 관계는 '바로 그런 것'이다.

📘
"
나는 이 책을 추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한 줄의 오후를 보내고
각주에 불과한 긴 잠에 빠지고
문장부호가 없는 가을에 도착한다 해도
(p20 추천사) "

일상의 몽환을 애정하는 그가 보여 좋았다. 한줄의 오후와 각주의 잠을 빠졌다가 제약없이 다가온 가을을 느꼈다면 '추천'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
"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악마의 얼굴을 한 미세먼지 속으로. 헛된 진실과 진정한 헛것들을 향해. 백운대와 인수봉 아래 격렬하게 펄럭이는 플래카드들의 기치 아래
김밥천국과 김가네 김밥의

격돌 속에서
그는 식사를 하려고 했다. 라면이나 덮밥 같은 것으로 휴대전화를 붙들고 울고 웃는 사람들의 통성기도와 함께
(p33 도봉구의 대립)"

몇년전 서울둘레길을 걷다가 시인이 그린 풍경을 만났던 것 같다. 북한산 우이역 근처분식집에서 꼬들한 라면을 후르륵거린 기억이 남는다. 몇 달의 주말을 털어 산길을 걸어,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그 때, 짊어지고 있었던 '헛된 진실' 무게와 '진정한 헛것'의 정체가 가물거린다. 머리에 지고 있던 '추상'의 무게보다 감미로운 탐식의 즐거움에 풍경을 휘발 시켰다. 그때 그랬다.

덧,
한권의 시집을 동물성의 사유로 채워놓고선, 사실 시인은 식물성의 사유를 그리워한다고 느낀다. 앞의 이야기가 '원죄'라면 뒤의 이야긴 '지향'일 것이다. 상징적인 지향일지, 현실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나의 비관적인 시선에선 '원죄'를 벗어나기 어렵다 생각한다. 내가 아는 현실은 대부분 비린내를 동반한다. 불행히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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