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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기린이 아닌 모든것

by 기시군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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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작가의 글에 기대어 있으면 편안하다. 결코 말랑말랑한 문장들이 아닌데도 마음 한쪽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시처럼 즐기는 소설. 이장욱작가의 소설이다. 요즘 신간이 없어 아쉬운 마음에 예전 단편집을 뒤졌다. 이책은 8편이 담긴 2015년 출간된 단편집이다. 제목의 기린은 동물원의 기린이 아니라 고대에서 전해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용의 머리에 사슴의 몸, 소의 꼬리에  말발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기린이 아닌 모든것이라니. 그건 뭘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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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몇 작품의 서두만 보자. 스포는 피해야 하기에 재미있어지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만 살짝 본다. ☺️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
그것은 편한 일자리였다. 일주일에 삼일. 주인없는 빈집에 들어가 4시간의 청소와 식사준비로 꽤 두둑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 33세 이혼녀인 나에게 이 제안을 한 집주인 역시, 내가 '수컷들이 선호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였을까싶다.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품행이 방정하고 타의 모범이 될 성향의 '나'는 다만 상상력이 조금 남들과 다르다. 엄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와 살아오면서 '뇌가 간질갈질'한 느낌 때문에 소소한 사고는 있었다. 아버지가 간첩이 된다던지 하는. 어른이 된 나는 어느 대학 박물관의 '기린불상'에 홀딱빠져 그곳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우리 모두의 정귀보
나는 화가 정귀보의 평전 집필중이다. 별볼일 없던 정귀보의 작품이 어떻게 뉴욕의 유수 미술평론가의 극찬을 받고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는지, 그런 그가 어떻게 자살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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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작품들의 인물들과 서사도 묘하다. 분명한 인과관계를 설명할 의도없이 작품들은 전개된다. 입양된 한국인의 이야기에 겹치는 '히스레저'의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듬기도 하고, 혹은 길에서 어깨를 부딪혀 시비가 붙은 남자에게 칼침을 맞거나 '어느날 욕실에서' 덩치 큰 남자를 만나는 이상한 우연들이 불가해하게 풀어진다. 요동치는 서사사이로 촘촘한 밀도의 묘사는 균질한 품질로 작품집 전체를 아우른다. 작가가 정색을 하고 '시뻘건 핏줄로 촘촘히 얽혀 있는 이 세계의 희미한 말초신경에 불과한' 인간들의 뚜껑안을 깊게 내려보는 듯 하다. 너무 기분나빠하지 말길 바란다. 삶에 대해 깊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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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야기를 해보자.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어느날 길을 걷는 기린을 목격한 착시에서 소설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순간 작가에게 내려온 '예술적 영감'에 더 다가가고 싶다. 단편의 후반부에서 묘사되는 '기린상'의 진위여부와 허상의 진정성을 믿는 화자의 결어긋감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실재하는 진실을 우리는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실재하는 진실이 있기는 한것인가. 거짓으로 쌓아올린 탑을 추앙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시간만이 진행되고 있지는 않는가. 답을 가두고 싶지 않다. 주제를 선명하게 새기지 않은 추상화처럼, 질문들 만이라도 이미 충만하다.

덧,
사족이다. 우린 각자 다른 모양과 의미의 기린을 가지고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다만 뭔지를 모르거나 있는지를 모를 뿐이다. 알고 있는 것은 기린을 제외한 모든 것 뿐이다. 평생을 걸려 기린의 존재를 인지하고, 찾아가고 의미를 부여하는 여정을 우리는 다른말로 '인생'이라 할 지 모르겠다.

p50 " 인간이라는 종의 생명만큼 가치가 과대포장된 게 있을까? 공부깨나 한 인간일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간일수록, 마치 인간의가치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말하지.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어이없는 거짓말인지는 금방 알수 있을 텐데, 그들 자신이 이 우주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그저 우연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걸까? "

p86 " 이름이란, 아무렇게나 흐르지 않도록 사람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p98 " 이상하게도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견딜 수 없어져. 모두가 나와 같은데 왜 외로워 지는 걸까? 혹시 모두가 나같이 외롭기 때문일까? "

p202 " 의혹이란, 부정하면 부정하는 만큼 죄인의 살을 파고드는 아라비아의 동아줄과 같다네. 부인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긍정을 향해 나아가지. 자네의 의혹은 점점 더 완강해졌고, 자네의 부정은 점점 더 자네의 긍정을 의미하게 되었네. 동아줄은 영혼의 연약한 살갗을 긁어대면서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잔인하게 파고 들었지. 이미 필연적인 결론이 예정돼 있다는 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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