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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고의는 아니지만

by 기시군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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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출간된 구병모작가의 첫 단편집이  2021년에 재출간되었다. 원래 좋아하던 작가. 다만 근작 #상아의문으로 가 살짝 멀리 가신 감이 있어서 어쩔까 하다가 초창기 센 분위기가 떠올라 후다닥 주문했다. 그리 두텁지 않은 책이라 연휴에 쉬엄쉬엄 읽었다. 역시나 그로테스크하고 하드함은 만족도가 높았다. 지금보다 시니컬하고 젊은 구작가님의 필치는 취향에 맞는다. 즐겁게 읽었다. (음. 사실 내용은 그렇게 즐겁진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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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에 실려있던 7편의 단편과, 추가한 1편 총 8편의 단편이 모여있다.

*마치... 같은 이야기 : '미무르'라는 별명을 가진 시장이 도시사람들에게 가정법을 금지시켜 버렸다. 마치 뭐뭐와 같은, 문장을 쓸 수 없다. 은유와 비유가 사라진 언어를 상상해 보자

*어떤 자장가 : 논문,리포트 대필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가난한 여성지식노동자. 밤새 일을 해야하는 데 아이가 안잔다. 돌아버리겠다. 끔찍한 일은 어떤 하루밤에 일어난다.

*재봉틀 여인 : 눈물샘을 재봉으로 꿰매버린 남자는 눈물을 흘릴 수 없다. 아니 눈물에 준하는 감정을 잃어버렸다.

*고의는 아니지만 : 그저 K선생은 유치원에서 준비물을 안가져온 아이들을 모아놨을 뿐이다. 준비물이 없으니, 준비물이 있는 원생과 다른 수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은 투덜대고 말을 안듣는다. 니들 엄빠가 준비물을 안챙겨줘서 어쩔 수 없다고 처음엔 살살 이야기 했었다. 고의는 아니지만 화가 나니 살짝 폭언도 했다. 고의는 아니었다.

* 타자의 탄생 : 카프카의 ‘잠자’는 벌레라 하더라도 움직일 순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몸의 반이 땅 밑 딴딴한 금속에 박혀 꼼짝도 못한다. 아내는 도시락한번 싸다주곤 이혼장을 날렸다. 경찰도 소방서도 구출을 못한다. 방송국 취재도 잠시였다.

*곤충도감 : 성범죄자들의 전자팔찌가 별 쓸모가 없다는 평가로, 새로운 대체제가 개발되었다. 성범죄자 몸안에 주입된 작은 곤충은 당사자가 흥분하면 엄청난 속도로 급성장해 숙주를 갈갈이 찢어놓게 된다.

*조장기 : 절망하는 사람들의 냄새에 달려들어 물어뜯어 죽여버리는 새떼들이 나타났다. 학교 휴학하고 생활비를 벌러 보육도우미일을 찾는 나에겐 아직 새떼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림 반 푼어치 학문의 힘 : 박사과정의 신랑은 언제 과정을 마치고 교수가 될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생활비 벌기위해 광고물을 만드는 작은회사에 다니는 아내는 꼬투리만 잡히면 잘라버리려는 팀장의 눈치가 괴롭다. 어느날 아내는 꼬물꼬물 엉덩이쪽에서 꼬리가 자라고 있음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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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를 쓴 #오은 시인의 글처럼, 십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효한 질문들을 가득 담은 작품집이다. 하나같이 어둡고 끔찍한 상황들이 펼치지고, 서로 물고 물리는 사람들은 결코 고의를 가지고 서로를 괴롭히진 않는다. 그저 열악한 삶의 물리적인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각자도생의 생활양식이 자신과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적용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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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편혜영 작가 작품들과도 분위기가 비슷하다. 물론 하드고어 측면에선 이 단편집이 훨씬 소프트하다. 그래도 불편한 상황과 묘사가 만만찮은 책이다. 어두운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분들이 꽤 계신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정화'는 희극보단 비극이 더 많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생겨날지 모를 비극의 '구멍'은 도처에 존재하며 그에 대한 대비는 이런 쎈소설로 가능하다라 본다. 세상의 불편함에 눈돌리지 말자.

p128 "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가져오라는 거 가져오고, 말좀 들어먹어! 그렇게 말 안 듣는 사람들 나중에 뭐가 되는지 알아? 너희도 커서 너희들 엄마 아빠처럼 저런 일 하면서 살고 싶어? .... 철조망 너머에 있던 인부들은 바닥을 수리하거나 나뭇가지를 치다가 다 같이 굳은 듯 멈추곤 철조망 사이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

p179 " 구멍은 어디에나 있어요. "

p204 " 놈은 그의 머릿속에 레이저를 통해 들어갔다고 한다..... 호르몬의 분비에 따라 조금씩 커졌다 줄어들었다 하는데...... 성행위 때 급속도로 팽창하면 먼저 뇌를 부순뒤 몸 아래쪽으로 밀려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목뼈를 부러뜨리고, 이어서 가슴뼈와 등뼈를 부순다. 그렇게 이동해도 공간이 비좁으니 결국 몸을 뚫고 밖으로 나와 버린다고"

p221 " 처음에 숲에서 목을 매 숨진 사람의 시체를 뜯어 먹은 새들에게 절망의 성분이 각인되었을 것이며, 그것들이 취한 부위는 피부만이 아니라 폐나 간을 포함했을 테고,... 그 맛과 냄새에 점점 익숙해진 새들은 살아 있는 이마저 시체인 줄로 착각하고 덤벼들기 시작했으리라는 거였다. "

p252 " (집들이에 오는 사람들은) 특별히 산해진미를 원해서 오는 게 아니라, 여자의 노동의 결과물을 보고 평가하고 싶어서 오는 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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