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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푸르른 틈새

by 기시군 2025.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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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틈새 #권여선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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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권여선작가는 이 장편으로 등단했다. 작가의 삶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삼십세. 덩굴처럼 엉킨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그녀는 삶을 살아간다. 여중생으로, 여고생으로, 대학에 입학하고, 운동을 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다. 습기 찬 반지하 월세방에서 이사를 준비하는 서른의 주인공은 살짝 열린 창문 사이, 푸르른 틈새를 비집고 내리는 볕으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본다.

난 작가를 #안녕주정뱅이 로 처음 만났다. 그 해 읽은 가장 좋았던 소설 안에 들어갈 것이다. 분위기만으로도 독자를 사로잡았던 작품들이 좋았고, 쓰디쓰지만 계속 등장하는 알콜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술꾼 누님으로 모시고 싶은 두 분 중 한 분이다. (나머지 한분은 #아버지의해방일지 를 쓰신 #정지아 작가님이시다. ☺️) 

2024년 이 작품이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시리즈 중 한권으로 새로 발간된다는 소식에 챙겨뒀었다. 그리고 우연찮게 햇살 좋은 휴일 낮시간에 이 소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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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10개월은 배를 타는 아버지, 망한 친정식구들을 건사하는 어머니, 주인공 나와 두 살 터울 언니는 아버지 없는 시간을 파산한 외할머니, 외숙모, 이모네 식구들과 함께 했다. 아들 없는 집, 별 관심받을 일 없는 집 막내딸이다. 그녀의 유년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10개월 만에 돌아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맛난 것을 먹여주며 이뻐해 하던 아버지와 함께 하던 짧은 순간이었다. 

가족, 그리고 친구, 결국 이기심이 배려보다 강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주인공은 자라난다. 본의 아닌 모험과 경험들은 조용히 쌓이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  80년대 대학이라는 불구덩이 같은 공간에서 합류하면서 그녀는 진짜 어른으로, 일상은 비일상의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던 ‘운동’은 시작은 자연스러웠으나 그 끝은 매끄럽지 못했다. 우연을 가장하고 시작한 사랑은 한 때 뜨거웠으나 통속적인 끝을 맺었다. 삼십세. 혼자만의 방의 나는, 가만히 소주 한잔 기울이며 담배 한 모금의 위로 안에서 쉴 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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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후일담문학인가 싶었다. 질풍과 같았던 80년대를 지난 청춘들이 나이들어가는 90년대 쏟아내었던 작품들. 성찰과 자기 과시의 혼탕 속에 들쑥날쑥했던 작품들 중 한 권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최소한 그런 종류의 작품은 아니었다. 성장소설임엔 분명하다. 작았던 시야, 보잘것 없는 경험, 좁은 사고를 가진 평범한 소녀가 겪고 느끼고 생각하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들을 현실감 있게 담은 소설이었다. 가감 없는 솔직함? 소설에 ‘솔직함’이란 단어가 어울릴까 싶다만, 작가 권여선은 이 데뷰작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벗겨내듯 내보이며 자신의 고통에 대한 ‘근원’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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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언제나 과거를 기술한다. IMF직전, 명문대출신 운동권 여성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결심을 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사실 이 장편을 다 읽고 나서도 선명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2025년을 사는 그 또래의 여성이 겪고 있는 경험과 결심의 결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혁명을 꿈꾸고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삶 어딘가에서 다치고 절망하고 사소한 것에 힘을 받고 위로 받는 일상은 계속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미래, 마음대로 되지 않은 연애와 섹스, 버리지 못한 꿈. 그때도 지금도 우리 뒷멀미에 손을 대고 있다.  

작가의 근작들을 읽고 있을 독자들에게 그녀의 시작을 알려주는 작품으로도 의미가 있다. 사실 3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 때문에 튀는 단어들, 진부해보이는 설정들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읽다 보면 다 잊을 것이다. 다만 자꾸 술 생각이 난다는 부작용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 

✍ 한줄감상 : 그 시대가 궁금한 독자, 그 시대를 지내온 독자 모두에게 한 번쯤은 읽어볼 만 하다 말해주고 싶은 소설.

p20 “ 대학 풋내기 시절 내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한시바삐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정치’와 ‘성’에 대해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이다. “ 

p136 “ 다방 안의 사람들이 나를 힐끗거렸다. 진한 호기심, 괘씸하다는 분노, 집요한 불쾌감 등이 혼합된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 내 얼굴과 손가락 새에 끼워져 있는 담배를 오고 갔다. “

p163 “ 꿈은 불가능에 대한 집요하고도 힘찬 편집적 기상을 담고 있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못 대단한 그 기상! “ 

p178 “ 감격하기 쉬운 습격은 아무도 고결한 이기주의와 맹목적인 이타주의의 결합이 나닐까 나는 생각한다. “ 

p187 “ 자위에서도, 자위의 대상이 현실적으로 성교 가능한, 성교가 허락되거나 권장되는 대상이 아니라 상상에서 조차도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될 끔찍한 대상으로 상상될 때 만족도는 증가한다. “ 

p222 “ 나는 연애가 아니라 이별을, 사랑이 아니라 그리움을 기억한다. 연애의 시작이나 과정은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지만 연얘의 끝은 언제나 특별하다. “

p238 “ 삼 년 동안 지속된 우리의 연애 관계는 짜증스럽고 긴 밤 내내 오직 관성에 의존하여 굴러가면서 물먹은 솜처럼 피로에 젖었다. “

P260 “ 누구나 자신의 사랑을 기준으로 상대방의 사랑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 

#독후감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bookstagram #독서 #추천도서  #book #책추천 #책소개 #서평 #한국소설 #푸르른틈새_기시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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