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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가나

by 기시군 2022.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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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산책 을 통해 발견한 작가다. 마음에 드는 소설가를 만나면 데뷰작을 찾게된다. 작가의 시작이 궁금했다. 책표지,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내의 모습이 몽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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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등단이후 2011년까지 발표된 9편이 단편을 모았다. 표제작 '가나'의 서술구성이 인상에 남는다. 바닷속을 떠다니며 고향을 추억하는 주인공은 '시체'다.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라는 단편을 보자. 섹스를 한 기억이 없는 젊은여자가 임신을 한다. 엄마를 위해 태아는 특별한 결심을 하게된다. 사랑해서 그럴 수 있단다. 이런 파격을 담은 플롯의 소설들과 '구름동 수족관' 같이 집창촌 여성과 장애아를 가진 홀아비 음식점주인의 '썸'타는 아야기, 소금 염전에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을 다룬 '벽'과 같이 조금 일반화된 소설의 양식을 따르는 작품등이 고루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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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침잠하여 자신 내면의 스크래치를 밤새 써내려가며 끙끙대는 문학청년이 떠올랐다. 그런 시간들이 데뷔시점에 그에게 준것은 안정적인 묘사의 힘과 나쁘지 않은 플롯의 구성 능력이다. 사물과 사건, 인물에 집중하는 힘은 놀랍다. 단순한 묘사로 그러한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대상에 대한 애정과 노력이 이 정도의 문학적 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구성 능력 또한 데뷰작에서 이정도면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일부 파격적인 구성에서 설익은 듯한 느낌을 주기는 하나, 다른 단편들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풀어진다. 근작을 보면 더 다듬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10년전에 완성형 작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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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묘사과 장애, 기이한 상황, 다양한 죽음의 모티브. 초기 정용준작가는 지금의 모습보다 더 어둡다. 한 없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침몰의 이미지는 아니다. 지금 현재 일상의 삶과 정반대의 모습들을 그려내면서 읽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다시 비춰볼 수 있게 유도한다. 삶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결과일 것이다. 자신은 어떤 스타일의 작품으로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관계할 것인가를 생각해냈고 그의 실현물이 이 작품이다. 난 이러한 어둠의 계보 안에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의 선택과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차근차근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 예정이다.

p62"해류가 몸을 떠민다. 그것은 무겁고 밀도가 높은 바람과 같았다. 그 흐름에 따라 천천히 발이 움직이고, 난 바닷속을 산책하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을 어찌 형용할 수 있을까, 부드러운 흙 속에 심겨진 나무뿌리처럼 나는 바닷속에 잠겨 있다. 생각이 난다. 회전하는 스크루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내 심장이 멈췄을 것이다. 오른쪽 허리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헤쳐진 살점과 내장들이 붉은 해초처럼 흔들린다. 갈치 두 마리가 내 곁에 맴돈다. 갈치가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흔들리듯 날카로운 빛이 반짝거린다. 갈치가 내 몸을 먹는다. 너덜거리는 살점을 먹고 손상된 내장을 뜯는다. 떠 있던 다리가 바닥에 닿는다. 바닥의 모래는 이제껏 밟아봤던 그 어떤 땅보다 부드러웠다."

p141"구름이의 얼굴은 기형이다. 왼쪽 눈은 촛농이 흘러 굳은 것처럼 밑으로 처져 있었고, 윗입술이 벌어져 입을 다물어도 잇몸이 보였다. 의사는 앞으로 왼쪽 얼굴이 점점 더 흘러내릴 거라고 했다. 구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농은 구름이를 수족관에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런 병신을 낳으려고 구름이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구름이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농은 어항을 집어던졌다."

p206"그는 본다. 카메라에서 떨어져 나온 깨진 렌즈의 하얀 균열을, 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여자의 속옷과 누군가의 발에서 빠져 나왔을 신발을, 피에 젖은 모자를, 목이 부러져 두 동강이 난 기타에서 삐져나온 터럭처럼 구부러진 여섯 줄의 현을, 부러진 안경을, 표지가 찢겨진 책을, 손톱이 붙어 있는 손가락을, 아직 죽지 않아 꿈틀거리며 피를 토하고 있는 목줄이 걸려 있는 개를, 상체가 콘크리트에 깔린 소녀의 하체를, 껍질이 으깨진 곤충의 다리처럼 규칙적으로 떨고 있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바람 빠진 공처럼 찌그러져 있는 머리를, 상의가 벗겨진 채 죽은 남자의 오돌토돌한 척추 뼈를, 그것들이 마치 꿈속에서 등장한 무의미한 사물들인 것처럼 아무 감정도 없이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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