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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by 기시군 2022.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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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작가의 책은 읽은적이 없다. 글 잘쓰는 퀴어작가라는 정도의 소문만 들었다. 요즘 화제인 #1차원이되고싶어 를 볼까하다가 데뷔작을 골랐다.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갔을 작품들. 뭔가 작가의 엑기스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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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무거운 주제들을 무겁지 않은 터치로, 그러나 결코 경망스럽지는 않은 자세로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퀴어로 사는 것을 이야기 하다가, 지금 이순간의 대상화되는 자아와 소비시대의 욕망으로 이야기의 폭을 넗힌다.
두편의 단편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과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퀴어의 사랑도 이성간의 사랑과 다르지 않음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와 "부산국제영화제 (원제: #부산국제영화제 )" 연작은 요즘 세태라고나 할까 SNS시대의 살며 사랑하는 모습들을 파괴적으로 묘사한다. 인상적인 연작이었다. 그 외 작품들 역시 자본의 세상에서의 개인의 소외 등을 그리고 있는데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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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퀴어에 대한 묘사나 언급은 기존 타 소설등에서 간접적으로 접했던 내용들과 결이 다르다. 헤테로입장에서 직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선명해진다. 별것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이성애자처럼 섬세하게 끌리고 애정하고 다툰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이렇게 이야기을 통해 느끼게 되는 것은 다르다. 책은 퀴어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다. 사실 퀴어라는 껍질 안에는 결국 인간이 있고 그 인간들은 사회라는 프레임 안에서 좌충우돌 하며 살아가게 된다. 지금 이순간 이 땅의 젊음이 어떻게 돈과 사랑 앞에서 좌절과 절망하며 때때로 극복하는지를  유머스럽게 때때론 잔인하게 묘사한다. 읽는 재미와 생각할 꺼리를 적절하게 같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균형잡힌 좋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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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퀴어소설을 기대했다가 다 잘 쓰는 소설가를 만났다. 진득한 농담과 어두운 배경에도 소설들은 스타일리쉬하다. 내가 극도로 애정하는 #이기호 작가가 쓴 추천사를 찾았다. 길지만 인용한다. "그의 소설은 유머리스트와 마조히스트가 어깨동무를 한 채 어두운 밤거리를, 작은 점이 될 때까지 걸어가는 이야기이다.  거기에는 결핍이나 금지 따위는 없다. 통제니 절제니 설득이니 하는 것들도 없다. 오로지 직진할 뿐. 망하면 망했지 가식이나 위선은 떨지 않겠다는 태도." 더할나위없는 추천사다. 동의한다. 이제 차근차근 그의 작품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

덧,
본문에 너무 칭찬만 써서 사족을 남긴다. 일부 작품들엔 '과잉'이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었으나 첫 소설집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넘어갔다. 그리고 사족하나 더, 간혹 등장하는 '게이 러브신'에서 왜 여성분들 사이에서 BL소설이 인기가 있은지 알게되었다. 👨‍❤️‍👨 여성분들이 보시면 꽤 야하게 느끼실듯  😁

p87"스폰서 업체의 텀블러에 녹차라테를 담아놓고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곁들여 셀카를 찍었다. 내 창백한 피부 톤과 투명한 텀블러에 담긴 녹차라테의 초록빛이 썩 잘 어울렸다. 테이블 옆에세워둔 은색 리모와 캐리어에 새로 산 보스턴백을 올려두고 찍은사진도 함께 업로드했다. 부산, 여행과 스타벅스, 부산국제영화제, 데일리, 같은 의미 없는 단어를 해시태그로 달아두었다. 치솟는 하트 수가 꼭 내 맥박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그조차 무감각해져버렸다."

p183" 어쩌면 나는 언제든지 스스로를 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꿈이나 희망, 기세 좋던 에너지 같은 것들은 그저 근거 없는 자신감만을 양분으로 하고 있던 것일지도."

p319"나는 언제부터인가 우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데, 대개의 눈물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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