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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일찍 눈뜬 새벽, 창문을 열면 차고 선명한 공기가 집안으로 몰려들어온다. 한 가슴 가득 숨을 들이키며 느끼는 포만감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기쁨일지 모르겠다. 우연히 우리 눈앞에 온 '순간'들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시인은 좀더 짙은 '순간'들을 그만의 시어들로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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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순간을 집어내고 명명하는 것. 그것이 시다.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과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살아p28'가는 우리들은 '명료'하려 하나 '흐릿'할 수 밖에 없다. 어느순간 무의미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무엇인가가 불쑥 솟아 오를때, 우린 그것을 인지하고 '명명'할 수 있다. 그것이 '시'일지 모르겠다.
문제는, '명명'이 후 일지 모르겠다. 이름지어주었다고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은 그것을 잊고나서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그늘에 잠겨가는 사람p89'이라면 거울의 비친 자신의 모습에도 몸서리를 치며, 그 사이를 더듬지 않을까? 버리지 않고는 결코 알수 없는 그것에 대하여 고민한 흔적이, 그것이 '시'일지 모르겠다.
'사이'가 무겁다. 기린과 기린아닌것 사이, '내가 아닌 모든 것과 나의 명백한 사이에서p111'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은 내가 아닌 너다. 믿을 수 없지만, '나의 이야기'는 사실은 '너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구원이든, 사랑이든, 동정이든, 책망이든 말이다. 그 사이를 열심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시인'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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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실들 속에서 태어났고, 언제나 사실이라 믿는 그것을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말의 껍데기와 말 안의 내용은 결이 어긋나기 마련이며, '우리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사실로 물들'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와 당신 또는 당신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이장욱 시인은 그것을 가장 잘하는 '시인'중에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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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작품집이다. 시집 안에는 이후에 발표될 #천국보다낯선 #기린이아닌모든것 의 근원이 되는 작품들도 실려있다. 시와 소설의 간극을 확인하는 것도 즐겁다. '시어'라서 가능한 독특하고 매력적인 문장들이 그득하다. 작년부터 찬찬히 이작가의 예전작품들을 한권씩 섭취하고 있다. 낮보단 밤에 봐야 이쁘다. 적당한 알콜기운이 있으면 더 좋다. 이장욱작가가 좋다. ☺️
p27 " 나는 침묵을 했는데 그것은 침묵이 아니고 비밀이 / 아니고 사실은 / 미동도 하지 않는다.(비밀) "
p31 " 나는 천천히 표백되었다. 조금씩 모든 것이 되었다.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표백) "
p66 " 아 그래서 내 입술이 개 입술에 닿았는데 / 입술만을 기억하는 거대한 입술이 되었는데 / 입술들은 무한하고 / 서로 닮았지만 (영원회귀) "
p72 " 당신을 잊자마자 당신을 이해했어 / 닫혀 있기 때문에 들어가고 싶은 문 앞에서 (밤에는 역설) "
p91 " 당신이 잠든 새벽에 누가 이쪽을 바라보면서 / 영정처럼 / 그렇케 캄캄하고 깊은 눈을 뜨고 있다면 (유물론자의 거울) "
p94 " 이 모든 것은 나의 이야기였는데 / 나는 너다. / 라고 황지우가 말했다 (유엔안보리) "
p119 " 아무래도 나는 분포되지 않았다. / 내가 있는 이곳에서 /네가 있는 그곳까지 / 여전히 여기 있다가 문득 / 우리가 여기 / 있지 않을 때까지 (동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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