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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만난아인슈타인 #민태기 #위스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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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기 박사의 두번째 책이다. 전작 #판타레이 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에 주저없이 골랐다. '판타레이'가 예술과 철학과 만나는 과학이야기였다면 이 책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은 구한말부터 혼란의 소용돌이 속을 거쳐오는 우리나라의 역사속의 과학자 이야기들이다. 저자의 꼼꼼한 취재와 노력 덕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자와 과학이야기를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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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연도별로 정렬된 목차가 이채롭다. 옮겨놓고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살짝 언급한다.
- [ ] 1895년 서울 서재필의 귀국 - 생각보다 거대했던 서재필의 재발견
- [ ] 1902년 샌프란시스코 안창호와 하와이 - 하와이의 한인들이 만든 '인하대학교'
- [ ] 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 - 아인슈타인을 처음으로 만난 조선인 황진남
- [ ] 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 21년, 조선 최초의 '상대성이론' 강연회
- [ ] 1922년 도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 당시 조선은 연희전문 수물과 한곳에서만 수학과 물리를 배울 수 있었다.
- [ ] 1923년 조선 전역 상대성이론 강연회
- [ ] 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 [ ] 1926년 서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야구 스타 최규남
- [ ] 1931년 교토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 [ ] 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 - 조선에 양자역학이 소개되다
- [ ] 1937년 교토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 '종의 합성'을 발표한 우장춘
- [ ] 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 - 지식인들의 소극적/적극적인 변절들
- [ ] 1945년 서울 해방공간의 꿈 - 미군정하에서의 과학사
- [ ] 1946년 제주 좌우 대결과 남북 분단
- [ ] 1947년 보스턴 여운형, 황진남, 서재필
- [ ] 1950년 부산 우장춘의 귀국 - 전쟁중에서 우장춘의 연구는 멈추지 않는다
- [ ] 1953년 판문점 한글 타자기와 우장춘 - 휴전협정서에 쓰인 공병우타자기
- [ ] 전쟁이 끝나고 구체제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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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숨은 이야기들이 꽤 많았다. 몇개만 보자. 요즘 김장철에 떠오르는 대목,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박사는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맞는 김장용 배추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기 위해 노력하던 대한인국민회는 베트남 독립을 위해 같은 강화회의에 참석을 시도하는 '응우옌'을 도왔다. 그가 후일 베트남을 통일 시키는 '호치민'이였다.
일본의 실크로 낙하산 소재 등 전쟁물자로 쓰던 미국은 일본과 거래가 막히자 나일론을 개발하여 수요를 대체했다. 1945년 종전 후 이제 나일론 스타깅을 신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미국여성들은 듀퐁의 독점과 생산량 부족으로 거리로 나와 폭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듀퐁이 독점을 포기하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고, 한국은 1953년 한 회사가 나일론 사업을 시작한다. '코리아'와 '나일론'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이 회사의 이름은 '코오롱'이다.
서울대의 시작이 미 군정 때 서울의 9개 전문학교를 합쳐서 만들었다는 사실도 처음알았다. 보성전문(고려대), 연희전문(연세대), 이화여전(이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을 합친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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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19세기 초, 식민지 과학자들은 전국을 돌며 아이쉬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소개하고 다녔다.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정치인, 군인의 시대인줄 알았던 그때, 이 땅의 과학자들은 '과학'이 조선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에 따라 많은 활동을 벌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강의가 벌어지는 1920년대 조선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도 그들은, 과학자들은 절실했고, 참석자들은 알아듣기 어려운 과학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일제 후반기, 일제의 강압에 많은 과학자들이 손을 놓을 수 밖에 없던 시절도 있었지만, 해방과 전쟁이라는 역사의 격랑을 거치는 시기에도 우장춘박사같은 과학자는 전쟁와중에 한국의 식량안보를 위해 각종 종자를 연구하고, 제주도에서 귤 재배를 추진하고,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서 감자를 키우며 과학을 통해 애국을 실천한다.
어쩌면 이러한 과학자들의 노력과 조선민중의 과학에 대한 열정이 아무것도 없는 구한말의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경쟁력있는 국가로 변화해 나갈 수 있던 씨앗이자 기틀이였을 것이다.
✍ 한줄 감상 : 격동의 시간에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우리나라의 과학발전을 위해 헌신한 선배 과학자들에 대한 헌정도서. 재미있지만, 이 책을 보기전에 '판타레이'부터 볼 것 ☺️
p24 " 독립협회는 점차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조금씩 대중을 끌어들인다. 서재필의 주장은 한층 과격해지고 있었다. 1897년 11월에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군주나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고 연설하기에 이른다. "
p47 "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든 돈이었다....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 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르 기부했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
p128 " 당시(1922년) 연희전문 수물과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학과 물리학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
p142 " 1920년대만 해도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불리는 자유주의가 팽배한 민주주의 사회였다. 메이지 천황에 이어 즉위한 다이쇼 천황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은 의회정치를 통해 군부를 제어하고 있었다. "
p180 " 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
p201 " 1942년 7월, 황진남이 있던 함흥에서 한 여학생이 조선어를 사용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구실로, 조선어 사전 편찬에 박차를 가하던 조선어학회 간부들을 일제히 체포한다. 이것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무려 33명이 '내란죄'로 함흥으로 압송되었다. "
p202 "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
p206 " 피천득 ' .... 우리나라는 과거에 저항 운동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근데 그걸 한 걸음 나가지 못하고...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이나 쉬고 이렇게 한 것이 지금으로(서는) 한이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2002년 여름 인터뷰) "
p221 " 1972년 박정희대통력의 지시로,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대극장과 인민문화궁전과 같은 대형 공연장에 놀란다. 박정희 정부는 급히 이에 필적할 공연장 건축에 나섰다. 이것이 세종문화회관의 시작이다. "
p275 " (우장춘박사) 그가 왜 이토록 한국의 삭량 문제 해결에 몰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정치적 이념이나 수사보다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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