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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것들의목록 #유디트샬란스키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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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 창문이 기억난다. 밤이고, 공기는 쌀쌀하다. 여름밤의 열린 창문, 달 없는 하늘,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뿐, 흙냄새가 난다. 어쩌면 비가 내렸을 것이다. 더는 모르겠다. p166 ‘
마음에 쓱 들어온 문장이다. 낯선 소재 탓에 힘들어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장들의 매력에 빠져 독특한 느낌으로 책을 읽다가 위의 문장을 만났다. 문장을 바라볼 때 나의 경험의 리트머스 지를 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의 페이지들이 수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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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구동독에서 태어난 작가는 글을 쓰며 북디자인, 편집일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 많은 상을 받아 이미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나는 작가 한강이 읽고 있는 책이란 것 때문에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독서목록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
이 책은 세계 역사에서 잃어버린 것들 12가지를 골라, 그것에 대해 기록해 두어야 할 내용들을 모은 책이다. 19세기에 사라진 남태평양의 작은 섬의 기록, 살인이란 개념이 없던 원주민들. 시베리아 호랑이의 아종 ‘카스피해 호랑이’가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벌린 사투. 폐허들. 무성영화의 필름. 시인 사포의 희미한 기록, 마니교의 책들. 낯선 것들을 살려와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놀라웠던 점은 역자의 말에서 알게 된 사실. 원서에서는 이 12개의 챕터가 동일한 숫자의 페이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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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라 표현하기엔 너무 무겁다. 하지만 아름다운 묘사와 문장으로 가득 찬 에세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역사서라 하기엔 너무 디테일하다. 하지만 읽어버린 것들에 대한 ‘몽타주 작업’이라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면 그것도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기억에 남는 내용이 많다. 타이거란 이름이 물살이 센 티그리스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 용의 발가락은 중국은 다섯 개, 한국은 네 개, 일본은 세 개라는 사실. 유니콘은 코뿔소의 잘못된 번역일 수 있다는 추정. 영혼은 발라내어질 수 있다는 상상. 달의 표면을 연구하는 ‘월면학’이라는 장르가 있었고 그걸 연구한 한 명의 학자가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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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부재의 차이가 미미하다는 작가의 단언엔 반대한다. 작가와 같은 집요한 탐구라는 특이한 케이스가 있어야만 가능한 명제다. 우리는 일상을 그저 상실로 채워가고 있을 뿐이다. 그 상실은 사실은 텅 비어있을지 모른다. 더는 모르겠다면서도 더 파고들어 찾아내고 그것을 문장으로 주조해 낸 작가와 범인인 나의 차이점이다.
✍ 한줄감상 : 상상하지 못했던 묘사의 힘, ‘문장을 꼼꼼히 채우려는 작가의 욕심’을 즐길 수 있다면 추천.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읽으시길.
p13 “ 칼리티에인들은 본인들은 죽은 부모를 먹으면서도 그리스인들이 죽은 부모를 태우는 풍습에 대해서는 강한 혐오감을 보였다고 한다. “
p15 “ 살아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
p17 “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은 언제나 예정된 폐기물이다. “
p55 “ 약 10,000년 전에 시베리아 호랑이와 카스피해 호랑이는 서식지가 나뉘며 두 아종으로 분리되었다. “
p70 “ 하나의 본능이 거부되는 곳에 다른 하나를 들어서게 하라. 살아 있는 자는 먹고자 한다. 먹는 자는 잉태하고자 한다. 잉태하는 자는 몰락하지 않는다. “
p87 “ 사람이 지나가면 길이 생겨난다. 내려놓으라. “
p109 “ 현재는 미래의 과거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
p145 “ 아프로디테의 하인인 에로스는 이미 세상을 완고하게 지배하고 있다. 에로스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신일뿐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분명한 증상을 가진 질병이기도 하다. “
p162 “ 오랫동안 신학자, 법률가, 의학자들의 논문에서, 트리버드, 사포주의, 레즈비어니즘 같은 개념들은 어딘가 유사어로 사용되었다. 자연을 위배하는 성행위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풍속이 아니면, 괴물에 가까운 비정상 혹은 정신적 질병을 의미하기도 했다. “
p176 “ 네 살이 거의 다 되었다. 네 개의 뻗은 손가락, 손 하나를 거의 채우는 나이. “
p194 “ (마니교를 창시한 마니에겐) 세상이라는 드라마는 빛과 어둠의 싸움이며 현존은 두 시간 사이의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다. “
p209 “ 힘든 것은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
p245 “ 잔인함이란 무엇인가? 키스를 통해, 모든 종류의 노출과 계시, 애무, 눈빛, 독서, 말을 통해 남자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그를 가차 없이 타오르게 하고 나서, 모든 약속한 것들과 반대로 절정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 분명 그러니까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이 고통의 광경을 즐기는 가학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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