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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농담

by 기시군 2026.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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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밀란쿤데라 #민음사 #Z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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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꿈이 있다. 세상을 뜰 때 심근경색으로 죽고 싶다. 한밤 아무도 없이 응급차를 부르는 옛 친구 따위는 없는 순간을 ‘끝’으로 맞이하고 싶다. 우리 운명은 죽음과 시간차가 있을 수 있다는 쿤데라의 의견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다. 책 말미 ‘고향’이라는 ‘도피처’에 안주하려는 주인공은 그 상징일 수 있는 친구의 죽음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소리일까? 시간차를 가장 줄이며 운명과 죽음을 동시에 맞을 수 있는 방법이 내겐 심근경색이다. 😎 

이십 년 만에 다시 읽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읽을 책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낡아 빠진 내 기억력이 고마울 따름이다. 핵심 이벤트 빼곤 다 새롭게 다가왔다. 자주색 소설이다. 핏빛과 밝은 보라 그 사이 어디쯤에서 ‘농담’을 다루지만 ‘농담’ 같지 않은 삶의 결들이 숱한 덧칠로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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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구석 고향을 떠나 대학생이 된 20살 루드비크는 마르케타를 사랑한다. 공산당에 영혼을 바친 당의 수녀 같은 그녀는 루드비크의 농담이 담긴 엽서에 놀라고(이번 반동주의자를 봤나), 고의는 아니라 해도 ‘당국’에 순순히 그 엽서를 내어준 덕분에 루드비크는 학교에서 짤리고 당에서도 쫓겨나고 탄광에서 5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탄광시절, 마을에서 그는 ‘루치에’라는 여성을 만난다. 그녀의 ‘우수에 가득한 느림’에 매혹된다. 거짓말이다. 낡은 옷 사이에 숨겨있던 그녀의 미모에 매혹된 것이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을 하고 동침을 하려는 순간 강렬하게 저항하는 그녀. 그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며 그녀를 폭력적으로 쫓아낸다. 한 번의 섹스를 위해 거의 탈영의 수준의 모험을 했는데, 여자의 반응이 그러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전 세계 어떤 인종이든 스무 살 남자의 뇌구조를 뜯어보면 거의 90%가 섹스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다. 

권위주의 정권과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시대와의 불화 등은 대충 넘어가자. 이미 우린 이념으로 전쟁이라는 형태를 통해 동족을 학살해 온 역사가 있다. 반동이 5년 징역이면 체코는 양반이네 싶다. 😅 그보다 중요한 건 삶이다. 농담에 다친 사내와 그를 둘러싼 인간들의 양태다. 인생처럼 소설에서도 세월은 지난다. 

루드비크가 퇴학을 당할 때 뒷통수를 친 남자의 아내를 유혹하기도 한다. 루치에를 돌봐주었던 종교인 친구를 통해 루치에의 딱했던 사정도 알게 되었다. 어릴 때 친했던 고향 친구는 마을의 작은 축제를 주관중이다. 루드비크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삶을 살아간다. 농담으로 시작된 비극은, 일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사이 삶 안에 끼어든다. 기억은 농담과 비극 모두를, 어느 순간엔 선명하게, 어느 순간엔 희미하게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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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p117’ 맞다. 그런데 이것이 내가 쿤데라를 가깝게 느끼고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다. ‘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결속된다든가 하는 일만큼 내게 역겨운 것은 없다. p132’라는 문장에 더 공감한다. 쿤데라는 무지성적 공감의 위험성이 주는 ‘폭력’에 집중하는 작가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웃음’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작가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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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농담’은 희극이다. 너무 진지하게 쿤데라를 읽지 말라고 언제나 말한다. 근원적으로 쿤데라는 한없이 가볍게 날아가기 위해 글을 쓴다. 신념, 관능, 열정, 쾌락, 폭력 등 무거운 것들을 어깨에 메고 날아오르는, 그 모든 것들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작가다. 귀찮아 그냥 두면 비극으로 번질 ‘농담’을 둘러싼 사건들을 가능한 치워버리고 정리하고 나서 편한 소파에 앉아 입맛에 맞는 독한 술 한잔으로 소회를 다시고 싶어 하는 작가다. 

‘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p488 ‘ 라며 독자들에게 웃음끼 지우지 않은 위로를 던지는 사람이다. 소설 ‘농담’도 그런 서사의 위로 중 하나이며, 청년 쿤데라의 근원적 상처와 그것을 소화하는 자세를 정리해 준 기록이다. 

✍ 한줄감상 : 쿤데라 소설 세계를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면, 전기 문학의 대표성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걸작.

덧,
내가 가장 인간적인 매력을 못 느끼는 두 번째 부류가  마르케타 같은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신념’의 근본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부류. 첫 번째는 신념 등 두 세 글자 한자어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 😂 

p19 “ 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사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 “ 

p55 “ (마르케타) 그녀는 어떤 것의 저 너머를 보는 것이 불가능했고 오직 그 사물 자체만을 볼 뿐이었다. “

p57 “ (농담의 내용)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 

p137 “ 사랑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들이 언제나 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던 상황들이 그런 계기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다. “ 

p300 “ 더욱 놀라웠던 것은 내가 이런 비열함을 아주 즐기면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기쁘게 또 어떤 시원함마저 느끼면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p380 “ 그녀를 그에게로 이끌었던 것은 그녀 영혼 속 그 공허였다. “ 

p416 “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파도, 당시의 내 나이에 대한 분노의 파도가 나를 온통 집어삼켰다. “ 

p417 “ 나는 지난 십오 년동안 루치에를 예전 나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거울처럼 생각해 왔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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