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벌집과꿀 #폴윤 #엘리
🐝
신형철 교수가 뽑은 2025년 올해의 소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오래 쟁여두었다가 차분히 읽어내려갔다. 향과 맛이 확실히 다르다. 제목 때문에 허니버터칩을 떠올렸다면, 이 소설은 그 기대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배반한다.
🐝
재외 한국인 소설가 폴 윤. 7편의 단편 안에 디아스포라와 정체성, 그리고 조상의 땅에 대한 시선이 고요하게 녹아 있다. 17세기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부터, 1880년대 러시아 정착지, 1980년대 바르셀로나까지, 시대와 국적과 불리는 이름은 달라도, 이들은 모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우리'의 슬픈 초상이다.
🐝
소설 속 인물들은 사막 한가운데 띄엄띄엄 솟아오른 선인장 같다. 각자 한 뼘씩의 자리를 위태롭게 차지한 채 고독에 떨고 있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며, 언제든 바람이 불면 또다시 낯선 곳으로 떠내려갈 듯 불안한 존재들.
작가는 거대한 역사적 서사 안에 작고 내밀한 개인의 서사를 정교하게 배치하고, 그 사이를 치밀한 묘사로 메워나간다. 무엇보다 행간에 의도적으로 비워둔 서사의 여백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소설의 품격을 끌어올린다.
🐝
감정을 철저히 덜어낸 건조하고 하드보일드한 문장이 꽤나 인상적이다. 사건은 속도감 있게 전개되지만 결코 조급하게 가속되지 않는다. 습지의 눅눅함과 사막의 푸석함이 손끝에 만져질 듯 생생하다.
파편화된 개인, 억압적 집단, 그리고 거대한 세계가 빚어내는 아슬아슬한 긴장. 가볍고 빠른 서사가 주도하는 지금의 출판 시장과는 분명히 다른 결의 소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질감이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 한줄감상: '하나의 결정이 어떻게 삶에 존재하는 그 모든 다양한 겹들을 드러낼 수 있는지 p286'를 보여주는, 섬세하고 치밀하게 직조된 웰메이드 소설집.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레이먼드 카버가 한국인이였다면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까?
덧,
상상해 본다. 어느 날 부모님이 조용히 나를 불러, 너는 사실 베트남에서 입양해온 아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아마 베트남의 역사와 사람들을 공부할 것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하지만 폴 윤처럼 그 사유를 이토록 섬세한 문학적 언어로 풀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작가가 부러운 이유다. 😅
p49 “ (보선) 카로는 보의 이름인 ‘보선’이 영어로는 배 위의 사병들과 장비를 책임지는 갑판 장교를 뜻하다고 설명해주었다. “
p62 “ (코마로프) 지금 자신은 북한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 거주 중인 54세 이주연 씨와 함께 있다고… “
p94 “ (역참에서) 히로코는 그 애를 조선 침략의 피해자라 부른다. 십년 전, 우리는 갓난아이였던 그 애를 조선에서 데려왔다. “
p127 “ (역참에서) 그 연극은 더 이상 목수가 아니게 된 목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집 짓는 일만 하고 살아온 나머지, 그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지요. 온갖 곳으로 여행을 하며 자신에게 또 다른 삶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저 계속 떠나고 또 떠납니다. 연극은 그렇게 끝납니다. 그 사람이 떠나고 또 떠나는 장면으로요. “
P161 “ (크로머) 그는 그 일이 자신의 기억 속에 계속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에게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거냐고 물은 남자나, 건물의 잔해가 눈처럼 내려앉는 동안 그의 팔에 안겨 있던 그레이스나, 한밤의 온실이나, 자동차에 스프레이로 쓰여 있던 글자들처럼.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해리의 내면에 붙들려 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빠져나가 사라져버렸다. 해리는 그 소년이나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날 밤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p189 “ (벌집과 꿀) 저는 그 순간 그 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게 무엇일지, 무엇이 그 애를 통과해 진갔을지, 슬픔인지, 분노일지, 둘 다 일지, 둘 중 어느 쪽도 아닐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
p211 “ (고려인) 막심은 개와 비슷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
p267 “ (달의 골짜기) 더 큰 광기로부터는 안전하시죠. 그 광기로부터 안전해질 수만 있다면 전 일평생 기꺼이 추방당해 사는 삶을 택할 겁니다. “
#bookstagram #books #reading #bookreview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독서기록 #책리뷰 #벌집과꿀_기시리뷰

'Cul-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0) | 2026.04.01 |
|---|---|
| 슬픔의 물리학 (0) | 2026.03.30 |
| 만남 (0) | 2026.03.25 |
| 터스크 (0) | 2026.03.23 |
| 살면서 한번은 벽돌책 (0) | 2026.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