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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모우어

by 기시군 2026.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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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어 #천선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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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졌다. 2~3년 전에 비해서, 이제 SF는 바짝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올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2대의 휴머노이드가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란을 향해 수십 군데에서 시차를 두고 발사된 미사일들이 단 한순간 한 지점에서 동시에 폭발하도록 계산하는 연산을 이미 AI가 해내고 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판단하여 인간을 살상하는 드론을 가자지구로 날린다. 80%의 정확도는 20%의 무고한 시민의 사망을 말한다.

SF가 무서워졌다.

따뜻한 SF작가 천선란의 이 단편집이 이 마음을 녹여줄 수 있을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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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이 실린 이 단편집에서 난 '뼈의 기록'이 가장 좋았다. 백 년을 넘게 인간을 화장하는 화장 전문 안드로이드 로비스와 인간 청소부 '모미’의 우정.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와 마음에 다가가려는 안드로이드의 행동이 작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도해(島海). 그들이 처리해야 하는 시신의 이름이다. 바다의 섬. 둘은 고독을 꽤 즐기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름이 추억을 소환한다. 일도(一島), 한문을 가장 좋아했던 고등학교 친구가 하사해준 내 호였다. 국어를 가장 좋아했던 나는 그 호를 스스로 번역해 '한섬'이라 불렀다. 같은 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저 난 호처럼 고독을 즐기진 못했던 것 같다. 그 친구와 붙어다니며 소심한 나쁜 짓이나 즐기고 다녔으니 말이다. 각설하자. 🙂‍↔️ (요즘 책 이야기 하다 맨날 딴길로 빠진다.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

로비스는 모미에게 '아름다움은 무엇이냐' 묻는다. 모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결국은 같을 수 없는 다름, 개별성에 방점을 찍는다. 나쁘지 않다. 그러면?

AI들에게 '아름다움에 대해서 한 문장으로 정의해줘.'라 질문했다.

*챗GPT는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한 순간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이다.'란다.
*제미나이는 '아름다움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인 조화를 넘어, 대상이 품고 있는 고유한 본질과 진정성이 우리의 마음을 깊게 울리는 긍정적인 파동입니다.'라고 한다.
*클로드는 '아름다움이란,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문득 낯선 것을 발견하는 순간의 떨림이다.'라고 정의했다.

난 클로드의 정의에 가장 끌렸다. 단편 '뼈의 기록'은 그 떨림에 가장 가까이 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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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접근이라면, 나와 당신의 죽음은 몸으로 흐르는 시간의 일부가 캡처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가장 과학적이어야 할 안드로이드 로비스는 죽음 앞의 인간을 위로할 줄 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그것)는 이렇게 대답한다.

‘ 죽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p144 ‘

역설적이다. 죽음을 너무 잘 아는 인간은 오히려 그 앞에서 말을 잃는다. 죽음을 모르는 기계가 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무지(無知)가 자비(慈悲)가 되는 순간이다. 캡처 따위는 버려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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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서도 등장하는 흔한 질문,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나요? p26'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사실에 대한 질문이 아닌 믿음에 대한 질문이다. 이과적인 삶을 살지만 문과적 감수성에 흠뻑 젖은 난, 작가처럼 대답하고 싶다. 나도 믿는다고. 그 속도가 아무리 느리고 꼼짝도 안 하는 것처럼 보여도 말이다.

이야기는 의외로 힘이 세다.

덧,
다른 단편들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아쉽다. 소소한 초능력자들의 사랑과 관계를 담은 '서프비트'는 읽는 재미가 있었다. 언어 자체를 주제로 한 시대극 같은 SF, 표제작 '모우어'도 인상적이었다.

✍ 한줄감상 : 누군가의 외로움에 공명하는 SF작가의 글은 언제나 따스함을 품는다.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비슷하지만 다른 색깔의 SF작가 김초엽이 이번에 신간을 내었다 하여 바로 결제했다. '해파리 만개'라는데, 천선란이 인간의 '온도'에 집중한다면 김초엽은 그 온도를 발생시키는 '구조'에 집중하는 작가라는 느낌이 있다. 어떤 느낌일까 더 궁금해졌다.

p14 “ 그녀는 그제야 산양이 말을 할 때마다 뿔 사이, 머리 가죽 밑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빛을 발견했다. “

p24 “ 곰 사람은 …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손끝에서 식물이 자라는 외계 종족을 만난 것과 과거로 가는 기계가 있다는 것과 외로운 인간의 피를 먹는 흡혈귀에 대한 이야기를요. “  

p33 “ 자연은 반복돼, 모우. 소멸하는 듯 보이지만 자신의 탈각을 집어삼키며 재생하고, 회복하고, 되살아나는 거야. “

p41 “ 인간이 많아지면 약속과 암호가 생긴다. 자칫 언어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건 매우 위험했다. “

p64 “ 엄마, 모우라는 이름의 뜻은…. 삶 “

p79 “ 나는 죽은 소나무들을 보며 생각한다. 죽어서야 물들 수 있다니. 살아 있는 동안 단풍이 얼마나 부러웠으면. “

p89 “ 삶에 대한 인간의 유난한 애착과 불안, 인정 욕구 따위가 지금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라고요! “

p141 “ 모미는 아홉 살 때 화상을 입어 덥고, 뜨겁고, 붉고, 타오르는 것들을 싫어합니다…. 모미가 죽음을 인지했더라면 화장이 아닌 매장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

p154 “ 나는 모두가 나처럼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줄 알았다. “

p193 “ 언니는 유태이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숫자도 가르쳐주고 거짓말도 가르쳐주었다. “

p304 “ 통계적으로 미래는,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어. 미래는 평온함을 품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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