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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사랑에 대하여

by 기시군 2026.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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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대하여 #체호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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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단편들은 저수지 같다. 500여 편의 단편을 남긴 그에게 가끔 들린다. 이번엔 2025년 이항재의 새 번역으로 나온 민음사 세문전 판, ‘사랑에 대하여’다. 표제작은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만, 책의 대부분은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공감을 하다가, 허허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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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편이 단편이 실렸다. 그중 몇 편은 체호프의 감각이 극대화된 작품들이다. 단 5페이지로 한 인생을 요약해 버리는 ‘물음표와 느낌표로 이어지는 인생’, 태어나서 처음 '굴'을 먹게 되는 가난한 아이의 이야기 ‘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가슴이 미어지는 마부 포타포프의 ‘애수’, 남의 집에 맡겨져 노예처럼 사는 아홉 살 반카의 ‘반카’. 이 작품들을 읽으며 문학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했다. 문학은 삶의 요약이 아니라 실감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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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역시 '사랑'이다. 표제작 ‘사랑에 대하여’의 서두에서 체호프는 말한다. 사랑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 모든 것은 해명이 아니라 오히려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제기한 데 불과하다고. 사랑은 '일반화'보다 '개별화'가 의미있다는 선언이다. 동의한다.

그러면서 그는 사랑을 '논하려면 일반적인 죄나 선, 행복이나 불행보다 더 중요하고 높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높은 곳이 아니라 깊/은/곳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도가 아니라 심도의 문제다. 사랑은 초월이 아니라 침잠이다. 혹은 다른 해석이 가능한 깊/은/곳이다.

‘사랑에 대하여’의 내용을 보자. 젊은 영주와 유부녀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끝까지 말하지 못한다. 고백은 기차가 떠나는 날에야, 포옹과 키스로 왔다. 사랑을 확인한 순간이 작별의 순간이었다. 체호프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결정하지 못한 사랑'의 결말을 보여준다.

다른 결말의 작품이 바로 이어진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이 작품의 진짜 힘은 냉소주의자 남주에게 있다. 평생 여자를 얕봐온 남자, 불륜을 습관처럼 반복해 온 남자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진짜 사랑에 무너진다. 그 아이러니가 소설 전체를 지탱한다. 체호프는 여기서도 결론을 주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며' 어떤 순간에도 막 시작되는 '상태'라고만 말할 뿐이다. 전편의 무력한 사랑, 후편의 무너지는 냉소주의자. 두 작품을 나란히 읽으면, 작가가 사랑에 대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답은 없다.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에 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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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다 믿는다. 사랑의 발현은 운명적일 수 있으며, 그 추락은 의도적일 수도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 있는 행위이며, 의외로 ‘말’로 실현되며 ‘육체’는 말을 돕는 형태로 발전된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행위가 될 수 있다. 금기와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에로티시즘. 시작은 종족의 번성을 위해 만들어진 감정의 조합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외로움을 단속하는 인간종들의 돌연변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 되었든, 삶에서 언제나 조연일 뿐인 ‘우리’가 유일하게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사랑’ 일지 모르겠다. 극의 끝이 비극이나 희극이면 어떤가. 단막극의 주인공인 경험은 귀하고 소중하다.  

✍ 한줄감상 :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정확한 눈. 특히 이번 책은 '사랑' 특집이니, 관심 있는 분들께 권한다. 단, 답을 찾으려 하면 실패할 것이다.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당연히 같은 세문전인 ‘체호프 단편선’은 기본적으로 읽어야 하며, 체호프 이전으로는 ‘고골’의 작품들이 좋겠다. 체호프 이후로는 결은 다르지만 카프카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

p13 “ [박식한 이웃에게 보내는 편지]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한답니다. (1880) “

p26 “ [그와 그녀] 아내는 사람들이 자신의 결점을 관대히 봐주는 걸 좋아하지만, 진실을 들려주는 건 싫어한다. “ 

p49 “ [인생은 아름다워] 단번에 세 명의 여자와 결혼할 가능성이 없음을 기뻐하라… “

p67 “ [애수] 이 수천의 사람들 중에서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지 생각한다. “ 

p72 “ [추도미사] 하느님의 종이자 탕녀인 마리야의 안식을 위해… “ 

p81 “ [반카] 어제는 매를 맞았어요. 요람에 누운 주인댁 아기를 흔들어주다가 무심코 잠이 들었다는 이유로 주인이 내 머리칼을 잡아 쥐고 마당으로 끌어내더니 가죽끈으로 호되게 때렸어요. “ 

p140 “ [이웃들] 내 이웃들 가운데 자네만 그녀의 정부가 아니었네. “

p163 “ [다락이 있는 집] 그녀에게 나는 언짢은 존재였다. 내가 풍경화가이고, 그림 속에서 민중의 가난을 묘사하지 않고, 자기가 그토록 믿는 것에 대해 무관심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 

p175 “ [다락이 있는 집] 인간에게 요구되는 노동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들 각자는 하루에 두세 시간 이하로 일해도 충분할 겁니다. “ 

p202 “ [상자 속 인간] 어제 나는 공포를 느꼈어요! 당신 누이를 보았을 때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여성이나 아가씨가 자전거를 타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

p218 “ [사랑에 대하여] 나는 불행했습니다. 집에서도, 들에서도, 헛간에서도 나는 그녀만을 생각했어요….. 나는 그녀가 왜 내가 아닌 그를 만났고, 왜 우리의 인생에서 이처럼 무서운 실수가 일어났는지 알아내려고 애썼습니다. “ 

p251 “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하지만 끝은 아직 멀고도 멀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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