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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연매장

by 기시군 202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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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장 #팡팡 #문학동네

🪦
좌파 보수주의자란 단어가 성립할까? 내가 보기엔 작가 팡팡은 그런 사람에 가깝다. 이미 이루어진 질서를 흔들 생각은 없지만, 모자란 부분은 부분적으로 수리해가며 사회 질서를 지키자는 사람. 다만 팡팡 스스로는 ‘역사적 사건의 옳고 그름은 작가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의도적인 판단 유보, 거기에서 나는 보수주의자의 한계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라는 '이상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 정도의 균형 감각을 갖춘 작가는 흔하지 않다.

권력의 폭력이 사람들을 어떻게 죽여왔는지를 기록하며,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 최대한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 거기에 적절한 완성된 서사 구조를 채우는 솜씨가 꽤 볼만했다.

🪦 
제목 '연매장'은 관 없이 흙에 곧장 묻히는 매장 방식이다. 원한이 많아 환생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죽음마저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로 삼는 것. 이 제목 하나에 소설 전체가 담겨 있다.

장개석은 타이완으로 쫓겨나고, 중국 곳곳엔 토지분배가 이루어지는 시절. 공산당을 도왔던 지주마저도 원한을 가진 농민들의 손에 심판을 당하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우리의 6.25 때 점령지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진 것처럼, 지주를 끌어다 놓고 재산을 빼앗고 살인을 벌이는 폭력적인 일. 지주 가문의 며느리였던 딩쯔타오는 그 소용돌이에서 기적적으로 빠져나오지만, 기억을 잃고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녀를 구해준 군의관 우자밍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지주 출신으로 신분을 숨기고 평생 가짜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과거를 '연매장'하며 살아간 인물이다. 시간은 흐르고, 그녀의 아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 올라간다. 또한 그녀 역시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숱한 '지옥도'를 하나씩 떠올려 간다.

🪦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성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까? 주요 인물 중 한 명, 영웅 류진위안의 인물 구성은 삐딱한 독자인 나에게 거부감을 준다. 혁명의 영웅, 비적의 소탕, 북한을 도와 6.25에 참전, 돌아와서 좋은 성분(?) 덕에 자식들은 현대 중국에서 자본가의 성공을 누린다. 심지어 의리까지. 이런 완벽한 중국 좌파 영웅담에 저자는 '숭고'라는 단어를 붙인다. 김훈 작가의 '하얼빈'을 읽을 때도 난 이 단어를 떠올린 적은 없다.

🪦 
어머니의 비밀을 코 앞에 두고, 칭린은 모든 사실을 덮어두기로 한다. 같이 비밀을 찾았던 교수 친구 룽중융은 이 내용을 책으로 내겠다고 한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 p.444' 두 선택을 모두 긍정하는 작가의 말에서 보수주의자의 한계를 다시 느끼게 된다.

우리에겐 비극의 끝까지 파고들어, 절대 그 사실들을 잊지 못하게 하겠다고 나선 #한강 작가가 있다. #황석영 작가가 있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실은 이 정도로 '순화된' 현실 소설을 금서로 지정했다는 중국 정부의 폐쇄성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

✍ 한줄감상 : 중국 현대사를 소설로 읽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 단, 비판적 책 읽기가 필요할 듯.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계속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가 떠올랐다. 왜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이 책을 읽으며 다시 깨달았다.

p17 “ 모든 망각을 배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망각은 살아남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 

p27 “ 그녀는 자기 등뒤에 가늘고 뾰족한 독가시가 숨겨져 있는 걸 발견했다. 

p36 “ 세상이 그녀 혼자 남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녀의 가슴에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 

p78 “ 살아가는 것 그리고 시간과 잘 지내는 것 만이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p149 “ 많은 사람이 정권 교체와 정국 안정화는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 그래도 우리는 꼭 그렇게 잔혹해야 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어. “ 

p183 “ 기층 농민들이 극도로 흥분해 이성을 잃었네. 공작조도 당황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결국 농민들처럼 통제불이 된 걸세.”

p198 “ 그들은 함께 죽기를 선택했다. 시아버지는 내일 아침 햇빛이 본인들 얼굴에 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흑을 메워야 한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 

p209 “ 아버님, 저는 두렵습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두려워요. “ 

p287 “ 그런데 미국이 북한을 침략하자 제삼차세계대전이 시작되어 국민당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비적이 다시 기세를 올렸다. “ 

p372 “ 연매장이! 부드러울 연에, 매장이요…… 시신을 곧바로 흙에 묻는다는 뜻이에요. 아무것도 없이요. 관도 없고 시신을 감싸는 멍석도 없이. 노인들 얘기에 따르면, 우리 고장에서는 누가 원한을 품은 채 죽으면서 환생하고 싶지 않을 때 연매장을 선택했답니다. “

p399 “ 나는 문득 우리가 모든 역사를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삶에는 자연도태의 법칙이 있잖아. 알리기 싫은 것들이 있으면 삶은 모종의 방식으로 그걸 감춰버리지. “ 

p421 “ 그 길에서 그녀는 명멸하는 유령을 따라 지옥 문을 넘어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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