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ul-Life

겨울통

by 기시군 2026. 6. 1.

✔️
#겨울통 #정용준 #은행나무

❄️
애정하는 작가 정용준이 신간을 냈다. 사랑이야기란다. 안 살 도리가 없다. 😂

아저씨의 삶을 살고 있지만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감미롭다. 물론 정용준이 알콩달콩 로맨스를 쓸 리는 없다. 사람 냄새 물씬한 이야기일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도, 궁금함을 안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예상대로였고, 조금은 예상을 벗어났다.

❄️
일단 남주 이야기부터. '인하'는 사고로 뇌를 다쳐 말을 잃었다. 대학원에서 조각미술을 전공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골 해변가 소랑군에 레지던시 작가로 머물고 있다. 음성합성기기를 통해 주민들과 소통하며, 주변을 밝혀주는 상큼한 청년이다.

여주 '동아'는 시인이다. 시원찮은 부모와 이런저런 사정으로 소랑군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인하가 오고, 가까운 곳에서 그를 겪으며 자연스럽게 마음이 기운다. 레지던시 기간이 끝나 떠나려는 인하를 플러팅 해서 잡아먹은(?) 것도 사실 동아다. 😅

이 둘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냐고? 그럴 리가. 이 소설의 세계관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 있다. '여름에 예고 없이 찾아와 겨울이 되면, 신체의 일부나 전부가 물이 되어 사라지는 병.' 이름하여 '겨울통'.

자, 이야기는 이제 시작된다.

❄️
같은 침대에 누워, 이랬으면, 저랬다면, 이랬겠지, 저랬겠지 말을 주고받는 것. 그저 같이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연인. 서로 줄 것을 찾다가 그것도 모자란 것 같아 애를 태우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몸짓이 가득하다.

‘안고 있으면 딱 내 온도만큼 따뜻해지는 이불 같은 부드러움. 내가 그토록 바라던 딱 적당한 사람이었다.p83’ 설명이 필요한 문장일까?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문장. 이 만큼의 온도를 가진 작가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었다. 

영원할 수 없다는 단 한가지 단점만 뺀다면 완벽한 사랑. 모든 소설이 그렇든, 이 책의 사랑도 변한다. 다만 둘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요인인 ‘병’으로. 죽어가는 연인의 마음과 그걸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또 한쪽의 마음이 찰랑거린다. 

❄️
‘그럼 잘 헤어져보자’라 한쪽이 말한다. 다른 한쪽은 인정할 수 없다. 내 사랑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다. 책 후반부는 남은 한쪽의 노력으로 채워져 있다. 나름의 미학과 감동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길이 나의 길이였다면 그 길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 같다. 대상이 사라진다고 내 안의 존재했던 ‘사랑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내 삶에 닥친 거대한 시련을 용기 내어 이겨내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사라져 버린 사랑을 ‘용기를 내어’ 다시 데려올 필요는 없다. 오르페우스의 용기는 마지막 순간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욕망을 함유하고 있으며, 에우리디케는 다시 그와 ‘전과 같은’ 사랑을 나눌 수는 없다. 

그저, 그 순간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인걸까? 삶이 죽어가는 과정인 것처럼, 사랑은 그것 자체가 식어가는 과정이라 말한다면 너무 정 떨어지는 이야기일까? 죽어가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듯,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이 순간’ 더 열정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하고 싶다. 

그리고, 만약 내가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겨울통’으로 사라지고 싶다. 

맑고 깨끗하다. 

✍ 한줄감상 : 깔끔했던 사랑의 시작과 너무 용기를 낸 사랑의 마무리가 함께 하는 ‘사랑이야기’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정작가의 책은 다 읽어본것 같다. 그중에서 추천하자면, 역시 ‘선릉산책’? 착한 이 작가의 어두움을 더듬고 싶다면 ‘우리는 혈육이 아니야’겠다. 

p31 “ 전신 겨울통에 걸리면 온몸을 잃고 부분 겨울통에 걸리면 신체 일부를 잃는다. 어떤 이는 오른발, 어떤 이는 귀, 어떤 이는 손가락을 잃었다. 녹은 버터가 부드러운 절단면을 남기고 사라지듯 뚝 떨어진다. “ 

p81 “ 내가 모르는 저 세계에 거주하는 연인의 몸을 안고 있으면 좋으면서도 슬퍼진다. “ 

p92 “ 나중엔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 읽었다. 책의 내용보다 내가 그 책에 남긴 흔적들, 이를테면 문장 밑에 그은 밑줄과 여백에 쓴 메모들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그것을 사랑으로 느꼈다. 그 순간을 자주 감각할수록 안심이 됐다. ”

p113 “ 엄마는 다른 남자를 만나 아이를 만들었고 아빠는 아이가 있는 여자를 만나 그 아이의 아빠가 됐다. 그리고 둘 모두 그 가정의 충실한 부모로 살고 있다. “ 

p133 “ 시간이 다 됐다. 쥐고 있는 이 힘을 단 한 번 놓으면 물이 된다. “

p190 “ 시는 쓰는 사람을 그대로 베끼니까. 시는 쓰는 사람을 재료로 쓰니까. “ 

p192 “ 나는 말하기를 실패하는 것이 싫어 말하기를 포기했다. 제대로 던지지 못할까봐 던지지 않았다. “

#bookstagram #bookreview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겨울통_기시리뷰

'Cul-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츠  (0) 2026.06.05
그래픽평전 스피노자  (0) 2026.06.03
실전 한국어  (0) 2026.05.29
엉엉  (0) 2026.05.27
도련님  (0)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