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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중요하지 않은 때가 있다. 카버의 소설이 그렇다. 왜 싸웠는지. 왜 헤어졌는지. 그날 밤, 그 또는 그녀는 무엇을 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관계가 시작되고 세월이 엮이면 분절음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부부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핏줄은 더 그렇다. 해결을 위한 이유를 따지는건 견딜 수 없다. 삶은 어처구니 없도록 길고 우리는 주어진 삶을 묵묵히 버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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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작과 절판된 11편을 새로 묶어냈다하여 골랐다. 카버를 기대했고 카버다운 단편들이 빼곡하다. 가장 좋았던 3편의 개요만 살짝 본다.
*상자들
원래 따스한 캘리포니아에 살던 엄마는 말리는 것을 듣지 않고 아들인 내가 사는 이 추운지역에 이사를 와 버렸다. 가깝게 산다고 달라질 건 없다. 아들을 자주 보지못하고 춥고 외롭다고 엄마는 징징거리다가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겠다한다. 상자에 짐을 싸놓은게 벌써 몇주전이다.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새벽2시에 낯선 여자의 전화가 자꾸 걸려온다. 잘못 걸린거라 이야기를 해도 듣질 않는다. 잠이 깨어버린 부부는 담배를 피우기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심각한 주제의 이야기도 아니다. 꿈이야기, 뉴스이야기을 거쳐 서로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새벽이 밝아온다.
*코끼리
파산직전인 동생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다. 이미 어머니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있고, 전처에게도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 어렵긴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차도 팔고 TV같은 가전기구를 팔아가며 동생부부는 살고 있다는데 돈을 보낼 수 밖에. 사실 그 뿐이 아니다. 놈팽이랑 사는 딸부부에게도, 대학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가겠다는 아들에게도 계속 보내야 한다. 아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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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없고 그저 다음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카버에 말에 공감한다. 의미를 찾는다는 행위가 의미의 존재를 보장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미를 찾아 헤맨다. 관계라는 수렁안에서 부딛히고 넘어지고 불화의 열기에 손을 데이기도 한다. 달콤했다가 식어버린 사랑의 관계나 저주받은 핏줄의 악년에서 헤메일 때도 카버는 스스로에게 충고한다. 기다리라고.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라고. 그것이 우리의 다음의 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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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유일한 장점은 스스로를 '대자적 존재'로 인식 할 수 있는 '기능'에 있지 않을까 한다. 전형적인 미국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는 그 장점을 작품생활 내내 꾸준히 유지했다. 자신의 삶의 기록들에 대한 필터를 걷어내고 날것 같은 생생함을 남겨두는 것. 마치 배의 튼살을 들쳐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듯한 행위. 작가랍시고 떠는 현학이나 우월감따위는 찾아 볼 수도 없다. 우리들의 눈높이에서 우리의 실패와 무지와 모멸을 이야기한다.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카버를 좋아하는 이유다. 이번의 카버도 역시 좋다. ☺️
p78 " (엄마는) 계속 전화를 해서 이곳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죄책감의 덧을 놓는 거야.' 질은 그걸 그렇게 불렀다. "
p121 "그곳에서보니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황급히 떠난 것 같다. 이 침대를 다시 보게 될 때마다 이런 모습을 기억하게 될 것임을 나는 안다. 우리는 이제 뭔가로 들어섰는데 그게 뭔지는 모른다. 정확하게는. "
p142 " 이제 내 인생이 있어. 당신 인생하고는 다른 종류의 인생이지만 우리가 비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이건 내 인생이고 그게 나이들어가는 내가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거야. 어쨌든 너무 상심하지는 마, 그녀가 말한다. 그러니까, 약간 상심하는 건 괜찮다는 거야, 아마도. 그런다고 다치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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