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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Life

남아 있는 나날

by 기시군 202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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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나날 #가즈오이시구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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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에 만족되지 않았던  #클라라와태양 만으로 가즈오이시구로의 문학세계를 판단할 순 없었다. 마침 ‘민음사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있어, 이번 #민음사북클럽 선택도서로 골라담았고, 며칠동안 즐겁게 읽었다. 태어나기만 일본에서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풍광, 그 안의 질서, 단정한 서술 등 영국작가의 작품 그대로였다.  삶의 태도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설득력 있게 잘 축조되진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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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의 내용을 살펴본다. 

영국 최고의 대저택 집사 스티븐스는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무장된 전문집사, 고급집사다. 얼마 전까지 몇십 년 동안 영국 귀족 다링턴을 주인으로 모셨고, 얼마 전 대저택을 구입한 미국인 새 주인님을 모시는 중이다. 다링턴을 모실 때 십 수 명의 직원들을 관리하던 업무가 축소되어 달랑 4명이 집을 관리하고는 있지만 집사로서의 프라이드는 버릴 수 없다. 

어느날 일주일정도 휴가를 권하는 주인의 제안에 따른다. 얼마 전에 받은 편지 때문이다.  오래전 결혼과 함께  다링턴가를 떠난 유능한 총무 캔턴 양의 편지는 왠지 스티븐스에게 돌아올 마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수의 인력으로 이 저택을 운영하기엔 빠뜻하다고 느끼던 참이라 가능하면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다. 

주인이 빌려준 고급 포드를 타고 짧은 영국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은 스티븐스의 과거의 사건들로 그를 불러들인다. 1차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분주했던 저택의 잦은 파티들. 정치인들과 귀족들, 외교관들. 그 사이 자신을 도왔던 까칠한 캔턴 양과의 에피소드 등을 떠올린다. 여행 마지막, 결국 그는 곱게 나이먹은 켄턴양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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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택 구석에서 역시나 집사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는 저택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결국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행사는 잘 마친 것에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갖는다. 그에게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공적인 삶, 그 공적인 삶의 정체는 ‘품위’를 가진 주인에 대한 ‘지적인 충성’이다. 많은 생각을 하지만 실무적인 생각일 뿐, 인간으로서의 ‘생각’은 존재하지 않은 도구적인 삶. 훌륭한 영국의 집사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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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이 잘 넘어간다. 절제되어 묘사되는 감정선들. 켄튼양과의 핑크빛 이벤트들이 일인칭시점에서 굴곡되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읽는 재미.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벌어졌는가, 어떤 사회적 분위기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역사소설로서의 재미도 만만찮았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역할을 명확하게 한다. 대기업에 다니며 조직에 대한 충성과 인정이 자신의 존재의미가 되는 전문가들이 넘치는 ‘능력주의’ 한국사회엔 숱하게 많은 스티븐스이 있기에 이 책은 존재의미가 높다.

다만, 이 정도의 잘만들어진, 명확하고 선명할 뿐 아니라 재미있는 소설은 세상에 꽤 많다.  피드 정리를 마치면서도 왜 이 작품이,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이라는 큰 상을 수상하게 된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수작임을 부인할 순 없지만 ‘한 방’이라 할만 것을 찾을 순 없었다.

✍ 한줄감상 :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부르제의 말이 떠오르는 웰메이드 대중소설.  

p41 “ 명백한 극적 효과나 화려함의 ‘결핍’, 바로 그 저이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차분한 아름다움, 절제의 미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다. “ 

p61 “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대륙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들이기 때문에 집사가 될 수 없다. “ 

p152 “ (부친의 죽음과 큰행사를 같이 치른 날) 지금도 그날 저녁을 생각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뿌듯한 성취감에 젖어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p156 “ 당시 우리에게 세상은 이 저명한 저택들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바퀴였으며, 거기에서 내려진 막강한 결정들이 부자든 가난뱅이든 바깥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간다고 생각했다. “ 

p194 “ 우리의 직업적 의무는 우리 자신들의 자만심이나 감정이 아닌 우리 주인의 뜻에 맞추는 것임을 당신도 빤히 알지 않소? “

p199 “ (캔턴)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저기 바깥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가져 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있는 내 모습만 떠올랐어요. “

p215 “ 내가 아는 한 집사의 집무실은 중추적 사무 공간이자 가사 운영의 심장부로서 전쟁을 수행 중인 사령관의 본부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따라ㅓ 실내의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정돈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수 사항에 속한다. “ 

p246 “ 사람이 노예가 되어서는 품위를 갖출 수 없는 법입니다. 그리너 우리 영국인들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그걸 움켜쥘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난날 바로 그 권리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지요. “ 

p258 “ 평범한 사람들의 지식과 학식에는 어차피 한계가 있게 마련이며 그런 사람들에게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중대한 국사를 논의 하는 데 기여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을 것이다. “ 

p267 “ 이제부터 내 한 몸 다 바쳐 이분을 섬기겠다 - 라고 자기 자신에게 단언할 수 있는 순간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이지적으로’ 부여된 충성심이다. “ 

p310 “ 글쎄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공허함은 아닐 겁니다. 벤 부인. 그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럴 리가 없지요. 일 다음에 일. 그리고 또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 

p320 “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쑥 뻗고 즐길 수 있어요. ….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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